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잇차-, 땅하-, 까-마 ㅡ 괴로움의 근본 원인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Icchā, Taṇhā, Kāma – Root Causes of Suffering’ 포스트
- 2021년 3월 7일 작성; 2021년 3월 8일 개정(#2 및 #3)
보통 사람은 감각적 즐거움은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렇게 인식합니다. 붓다께서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갈애)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감각적 즐거움은 그것들에 대한 갈망(갈애)이 없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까-마와 감각적 즐거움 사이의 차이
1. ‘까-마란 무엇인가? 그것은 섹스만이 아니다’ 라는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까-마(kāma)와 ‘좋은 감각 경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 까-마(kāma)는 그 감각 경험들을 더 많이 즐기고자 하는 욕망/갈망입니다. 그 때문에 ‘잇차-(icchā)’와 ‘땅하-(taṇhā)’라는 낱말은 까-마(kāma) 및 까-마 라-가(kāma rāga)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왕들을 비롯하여 부유한 사람들은 부처님께 맛있는 음식을 드렸습니다. 붓다께서 오랫동안 사셨던 제따와나-라-마야(Jetavanārāmaya)는 궁전처럼 지어졌습니다.
* 물론, 붓다께서는 병을 앓으시면서도 삶의 마지막 몇 달을 여행하며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제따와나-라-마야(Jetavanārāmaya)나 그런 많은 사원 중의 한 곳에 머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붓다께서는 자신이 노년에 겪고 있는 고통을 [여행을 하시면서 몸소] 설명하시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 부처님의 주된 메시지는 감각적 즐거움의 장기적인 나쁜 결과를 보지(알지) 않는 한, 미래의 고통/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계적으로 거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나쁜 결과를 먼저 보아야(알아야)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비유
2. X라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술을 마시는 것이 자신에게 기분좋은 경험이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술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 X가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그는 음주량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X가 얼마나 많은 양을 마시는지 들은 의사는 그에게 음주를 줄이라고 조언합니다.
* 하지만, X는 그 습관을 고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음주를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며칠 후에는 일상적인 음주 습관으로 되돌아갑니다.
* 어느 날, 그는 심한 복통과 부어오름을 경험합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는 간을 스캔해 보고, 간이 손상되었으며 뇌를 제외하고 그것은 신체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이라고 설명합니다. 의사는 그에게 술을 끊지 않으면 곧 심각한 건강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i) 이제, 처음으로 X는 음주의 위험성을 ‘보고(알고)’ 그의 음주 습관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음주에 관한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āsa)’, 즉 ‘잘못된/왜곡된 견해’를 없앴습니다.
(ii) 1년 후, X는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고, 의사는 그의 음주 습관에 대해 묻습니다. X는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이 두려워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충동이 너무 강해질 때는 술을 마시곤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전히 음주에 대한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 즉 ‘잘못된/왜곡된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의사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합니다. (i) 간 손상의 위험에 대해 계속 숙고하고 (ii) 또한 금주로 얻은 경감(더 이상 복통/부어오름 등이 없음)에 대해 계속 숙고하고, (iii)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iv) 과음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하세요.
* 의사의 조언에 따라, X는 점차 음주에 대한 욕망을 잃습니다. 몇 개월 후, 그는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욕망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는 음주에 관한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도 없앴습니다.
성스런 길에서 유사점들
3. 사람들(그리고 모든 유정체/중생)은 위 #2 비유에서 알코올 중독자 X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것들이 주는 ‘즉각적인 즐거움’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 부처님은 그런 마음가짐(마음성향)의 위험을 볼 수 있는 의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것들’을 갈망하는 것은 결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에게 확신(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 소따빤나(Sotapanna)는 부처님의 참된 제자(아리야, Ariya)로부터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의 위험을 배웁니다. 소따빤나(Sotapanna) 단계로 전환하는 것은 그가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의 위험을 ‘보기(알기)’ 시작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 두 경우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손상된 간을 스캔하고 X에게 그 위험을 확신시킬 수 있었던 의사와 달리, 재탄생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설명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단계에 도달하면 아래와 같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i)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위험을 보는’ 소따빤나(Sotapanna)는 ‘과음의 위험을 보기’ 시작한 X와 유사합니다. 소따빤나는 이제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āsa)를 제거했습니다.
* 두 경우 사이에는 두 번째 차이점이 있습니다. X는 ‘의지력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의 ‘옛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반면에, 소따빤나(Sotapanna)의 마음성향은 미래의 삶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ii) X와 마찬가지로, 소따빤나(Sotapanna)는 감각적 즐거움이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마음성향(산냐- 위빨라-사, saññā vipallāsa)을 여전히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소따빤나는 그런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는 않습니다.
* X와 유사하게, 소따빤나(Sotapanna)는 세속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결점/단점을 숙고해야 하고(즉, 아닛짜, 둑카, 아낫따라는 본질을 숙고하는 것인, 아닛짜-누빳사나-, 둑카-누빳사나-, 아낫따-누빳사나-를 함), 닙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야(교제해야) 합니다.
* 그(소따빤나)가 세속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결점/단점을 [계속] 숙고함에 따라,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는 사라지고 어느 날 그는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 후에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집니다.
* 많은 사람들이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와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위의 비유가 유용하기를 바랍니다.
까-막찬다와 까-마 라-가 사이의 차이
4. 위의 내용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따빤나(Sotapanna)는 까-막찬다(kāmacchanda)를 제거했지만 까-마 라-가(kāma rāga)는 남아 있습니다.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가 제거될 때, 감각적 즐거움에 의해 눈멀게 되지 않습니다. 즉 까-막찬다(kāmacchanda)가 제거됩니다. 그러나 감각적 즐거움을 좋아하는 경향(즉, 까-마 라-가, kāma rāga)는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가 여전히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소따빤나(Sotapanna)는 재가자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따빤나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 까-마 라-가(kāma rāga)가 강해질 때에만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해로운 활동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할 때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따빤나(Sotapanna)는 본능적으로 그런 활동을 삼갈 것입니다.
* ‘나쁜 친구들’와 어울리면, 보통 사람은 해로운 활동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냥과 낚시는 삼가야 할 부도덕한 활동입니다. 그런 활동은 ‘스포츠 활동’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져 많은 사람들이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그런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런 활동은 붓다 담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유정체/중생을 해치는) ‘위힝사-(vihiṃsā)’ 범주에 속합니다.
* 위힝사-(vihiṃsā)는 브야-빠다(vyāpāda)와는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브야-빠다(vyāpāda)로, 사람은 분노/증오하면서 부도덕한 행위를 합니다. 위힝사-(vihiṃsā)로 하는 행위는 아윗자-(avijjā)로 행해집니다.
자-나는 까-마를 극복한 브라흐마(범천)의 마음성향에 해당한다
5. 자-나(jhāna, 선정)을 길렀을 때, 브라흐마 영역(범천계)에 태어납니다. 자-나(선정)를 기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까-마(kāma,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 따라서, 자-나(선정)를 기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억제해야 합니다. 사실은 까-마(kāma), 브야-빠-다(vyāpāda), 및 위힝사- 상깝빠(vihiṃsā saṅkappa)를 삼가야 합니다(즉, 감각적이거나 화내거나 다른 유정체에게 해를 끼치는 생각을 포함하는 생각을 삼가야 합니다).
* 이것이 모든 범천계의 범천은 범천으로 존재하는 동안 까-마 라-가(kāma rāga), 브야-빠-다(vyāpāda), 위힝사-(vihiṃsā)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가 팔라(magga phala, 도과)를 성취하지 못했다면, 세 가지 모두 그 존재 중에 아누사야(anusaya, 잠재성향)으로 숨겨진 상태, 즉 일시적으로 억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 그것은 자-나(선정)와 관계를 보여주는 ‘사이드 트랙(side-track, 곁길)’일 뿐입니다.
보통 사람(범부 중생)과 성자 사이의 차이
6. 다음 표는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로칸은 보통 사람(범부 중생)과 성자(아리야)를 보여줍니다. 성자에 대한 4개의 칸은 세 번째 세로칸에 표시된 바와 같이, 사성제를 나타냅니다.
보통 사람 | 성자 | |
까-마(kāma, 감각적 경험)는 가치가 있다. | 감각적 경험은 가치가 없고 괴로움이다. | 첫 번째 성스런 진리(괴로움) |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를 추구하는 것은 유익하다. | 까-마 앗사다를 추구하면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 두 번째 성스런 진리(괴로움의 근본 원인) |
감각적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면 괴롭다. | 까-마(kāma)의 갈망이 없으면 미래의 괴로움이 멈춰진다. | 세 번째 성스런 진리(미래의 괴로움이 멈춤) |
성스런 팔정도는 즐겁지 않다. | 성스런 팔정도는 괴로움을 멈추는 길이다(즉, 까-마의 갈망을 잃는 것임). |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괴로움을 없애는 길) |
* 첫 번째 성스런 진리는 괴로움(둑카)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것은 괴로움(둑카)이 아닙니다. 감각적 즐거움은 가치가 없으며 현생에서도 (마음에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괴로움(둑카)을 야기합니다. 물론 내생에서도 더 많은 괴로움(둑카)이 나타날 것입니다.
* 현생과 내생에서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까-마, kāma)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성스런 진리입니다.
* 보통 사람(뿌툿자노, puthujjano)은 감각적 즐거움이 없으면 괴롭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애쓰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성스런 진리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까-마, kāma)을 잃음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멈춰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 보통 사람(뿌툿자노, puthujjano)은 성자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멀리하는 삶을 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범부 중생)은 그런 삶은 괴로운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살며 상상할 수 없는 괴로움(고통)이 있는 아빠-야(apāy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성자가 되는 길(갈망을 잃는 길)은 팔정도입니다. 그것이 네 번째 성스런 진리입니다.
* 다시 말하면, 까-마(kāma)는 ‘상깝빠 라-가(saṅkappa rāga)’, 즉 ‘감각적 즐거움(그리고 ‘자-나_선정’의 즐거움까지 포함)이 유익하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물론 루빠 라-가(rupa rāga)와 아루빠 라-가(arupa rāga)를 제거하기 전에 먼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까-마 라-가, kāma rāga)을 제거해야 합니다.
잇차-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다 ㅡ 첫 번째 숫따에서
7. 첫 번째로 설하신 경에서, 붓다께서는 괴로움은 잇차(icchā)에서 비롯되어 일어난다고 정의하셨습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브야-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 ㅡ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첫 숫따에 있는 불교의 에센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거기서, 붓다께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얌 삐 잇창- 나 라바띠 땀 삐 둑캉(yam pi icchāṃ na labhati tam pi dukkhaṃ)”으로서, “원하는(icchāṃ) 것을 얻지 못할(na labhati) 때 괴로움을 겪는다”입니다.
* 그 욕망(icchā, 잇차-) 때문에, 원하는 것을 가까이 유지(upādāna, 우빠-다-나)하려고 힘씁니다. 그것들은 그 사람의 빤짝칸다-(pañcakkhandhā)에서 좋아하는 일부분, 즉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입니다.
* 자세한 내용은 ‘잇차-(갈망)는 우빠-다-나로 이어지고 결국 고통(괴로움)에 이른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8. 앗차-(icchā), 땅하-(taṇhā) 및 까-마(kāma) 사이의 관계는 그 괴로움(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두 번째 성스런 진리에서 나옵니다. 즉, “야-양 땅하- 뽀놉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 ㅡ 까-마 땅하-, 바와 땅하-, 위바와 땅하-(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kāma taṇhā, bhava taṇhā, vibhava taṇhā)”입니다.
* 잇차-(icchā)(좋아함/바람) 때문에, 우리는 들러붙게 됩니다(taṇhā, 땅하-). 재탄생된 존재로 이끄는 것은 이 들러붙음(taṇhā, 땅하-)입니다. 그 땅하-(taṇhā)는 바로 이 세상의 즐거운 것들에 대한 땅하-(까-마 땅하-, kāma taṇhā), (재탄생을 믿는 자들이)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땅하-(즉, 바와 땅하-, bhava taṇhā), (재탄생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생이 지속되는 동안 즐거움을 최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땅하-(즉, 위바와 땅하-, vibhava taṇhā)입니다.
* 여기서, 까-마 땅하-(kāma taṇhā)는 바와 땅하-(bhava taṇhā)와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를 지닌 두 그룹에 공통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세요.
9.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어떻게 그 괴로움의 일어남이 멈춰질(니로다, nirodha)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즉, “요 땃사-예와 땅하-야 아세사 위라-가 니로도 짜-고 빠띠닛삭고 뭇띠 아날-라요(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 virāga 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로서, “그 땅하-(taṇhā)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치고, 그것을 포기하고,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그것에 대한 모든 애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 물론, 미래의 괴로움을 멈추는 길은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에 있습니다. 즉, “아야메와 아리요 앗탄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ㅡ 삼마-딧티 … 뻬 … 삼마-사마-디(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sammādiṭṭhi … pe … sammāsamādhi)”로서, “그것은 이 성스런 팔정도다. 그것은, 삼마- 딧티 … 삼마- 사마-디다”입니다.
잇차-, 땅하-, 까-마 ㅡ 성스런 팔정도를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10. 여기서 핵심은 그 세 가지(‘잇차-_icchā’, ‘땅하-_taṇhā’, ‘까-마_kāma’)는 의지력이나 (의례)의식으로 직접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왜 잇차-(icchā), 땅하-(taṇhā), 까-마(kāma)가 괴로움을 일으키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팔정도에서 첫 번째 단계이며, 바로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입니다.
* 그것이 이해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성스런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먼저, 그에 맞게 생각합니다(삼마 상깝빠, Sammā Saṅkappa). 그 다음 나머지도 뒤따르게 됩니다. 즉 그 마음가짐으로(삼마- 사띠, Sammā Sati), 말하고(삼마- 와-짜-, Sammā Vācā), 행동하고(삼마- 깜만따, Sammā Kammanta), 노력하고(삼마- 와-야-마, Sammā Vāyāma), 살게(삼마- 아-지와, Sammā Ājiva)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에 도달하게 됩니다.
* 잇차-(icchā), 땅하-(taṇhā), 및 까-마(kāma)에 숨겨진 괴로움을 이해하는 두 가지 설명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띨락카나(Tiakkhana)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 물론, 그 두 가지 방식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포스트를 진행하게 됨에 따라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어느 정도 명확해야 합니다.
11. [관련된] 모든 포스트들은 이 서브섹션 ‘빠띳짜 사뭅빠-다 ㅡ 필수 개념(Paṭicca Samuppāda – Essential Concepts)’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