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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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무더기와 띨락카나 ㅡ 소개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Five Aggregates and Tilakkhaṇa – Introduction’ 포스트

- 2020년 5월 27일 작성

 

다섯 무더기와 띨락카나(아닛짜, 둑카, 아낫따)에 대한 포스트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다섯 무더기는 모든 유정체의 세계를 묘사한다

 

1. 다섯 무더기(빤짝칸다-, pañcakkhandhā)는 ‘외부 세계’와 함께 모든 유정체를 나타냅니다. 다섯 무더기가 자신의 물질적 몸(육체)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과거 경험과 미래 기대를 포함하여 유정체에 대한 모든 것이 빤짝칸다-(pañcakkhandh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가띠(gati), 아누사야(anusaya) 등은 모두 빤짝칸다-(pañcakkhandhā)에 있습니다. 다섯 무더기(The Five Aggregates, Pañcakkhandha)에 대한 이전 포스트들을 읽어보세요.

 

  • * 필자가 그 몇 개의 포스트에서 요약한 것은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의 칸다 상윳따(Khandha Saṃyutta)에 있는 많은 숫따-(suttā)의 자료입니다. 띠삐따까(Tipiṭaka, 빠알리 삼장)의 다른 부분에도 [관련] 숫따(sutta)가 있습니다.

  • * 그 숫따(sutta)들에서 붓다께서는 모든 주어진(특정) 유정체를 빤짝칸다-(pañcakkhandhā), 즉 루빡칸다(rupakkhandha), 웨다낙-칸다(vedanākkhandha), 산냑칸다(saññākkhandha), 상카-락칸다(saṅkhārakkhandha), 및 윈냐-낙칸다(viññāṇakkhandha)로 묘사하십니다.

  • * 그것들은 형상, 느낌, 지각, 정신적 형성 및 의식으로 대략적으로 번역된 다섯 무더기입니다. 우리가 논의했듯이 그런 번역은 오도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빠알리(Pāli) 용어를 사용하고 그것들의 진정한 더 넓은 의미를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윈냐-나(viññāṇa)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와 위빠까 윈냐-나(vipaka viññāṇa)라는 두 가지 유형일 수 있습니다. '모-하/아윗자-'와 '위빠-까 윈냐-나/깜마 윈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빤짜 우빠-다-나 칸다-(다섯가지 집착 무더기)는 아라한에 이를 때까지 거기에 있다.

 

2. 우리는 또한 ‘다섯 무더기(The Five Aggregates, Pañcakkhandha)’ 섹션에서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ā)(개략적으로 ‘다섯가지 집착 무더기’로 번역)가 의미하는 바를 논의했습니다.

 

  • * 아라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모든 유정체는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ā)를 가집니다. 살아 있는[무여열반에 들지 않은] 아라한은 빤짜 칸다-(pañca khandhā)는 가지지만,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ā)는 가지지 않습니다.

  • * 아라한뜨(Arahant, 아라한)의 빤짜 칸다(pañca khandhā)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것은 아라한이 31영역의 어디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지한 유정체’(삿따)의 정의

 

3. 붓다께서는 삿따 숫따(Satta Sutta, SN 23.2)에서 라-다(Rādha)에게 삿따(satta, 유정체)가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루-뻬 코, 라-다, 요 찬도 요 라-고 야- 난디- 야- 땅하-, 따뜨라 삿또, 따뜨라 위삿또, 따스마- 삿또띠 윳짜띠. 웨다나-야 … 산냐-야 … 상카라-레수 … 윈냐-네 요 찬도 요 라-고 야- 난디- 야- 땅하-, 따뜨라 삿또, 따뜨라 위삿또, 따스마- 삿또띠 윳짜띠”

(“Rūpe kho, Rādha, yo chando yo rāgo yā nandī yā taṇ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Vedanāya … saññāya … saṅkhāresu … viññāṇe yo chando yo rāgo yā nandī yā taṇ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번역(단지 의미만): “ ‘라-다(Rādha)’여, 바램(찬다, chanda), 라-가(rāga), 그리고 물질 형상(루-빠, rūpa)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인식(난디-, nandī)이 있을 때, 형상에 대한 집착(삿또, satto), 강한 집착(위삿또, visatto)이 있고, 그러면 무지한 유정체(삿또, satto)가 있다고 말한다. 비슷하게, 바램(찬다, chanda), 라-가(rāga), 그리고 웨다나-(vedanā) … 산냐-(saññā) … 상카-라(saṅkhāra) … 윈냐-나(viññāṇa)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인식(난디-, nandī)이 있을 때, … 유정체가 있다고 말한다.”

 

  • * 다른 번역은 “Sentient Beings”에서 볼 수 있습니다.

  • * ‘삿따(satta)’라는 빠알리 낱말은 ‘집착’ 또는 ‘들러붙음’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집착이 강한 것은 ‘위삿따(visatta)’라고 합니다.

  • * 다시 말하면, 빤짝칸다-(pañcakkhandhā)에 대한 우빠-다-나(upādāna)가 있는 한(즉, ‘빤쭈빠-다-낙칸다-_pañcupādānakkhandhā’가 있는 한) ‘무지한 유정체(삿따, satta)’가 있습니다. 그 유정체는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 즉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ṇa)’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삿따’와 ‘뿌툿자노’ 사이의 차이

 

4. 또한 ‘삿따(satta)’와 뿌툿자노(puthujjano)라는 용어 사이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뿌툿자노(puthujjano)’라는 명칭은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ṇa)를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인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삿따(satta)’라는 용어는 모든 유정체(도과를 얻지 못한 ‘데와’와 ‘브라흐마-’를 포함)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 * 필자는 ‘무지한 사람(ignorant person)’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사람’이기도 하지만 아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ṇa)를 기르기 시작한 ‘아리야 뿍갈라(Ariya puggala, 성스런 사람)’와 구별합니다.

  • * 앗사-다 숫따(Assāda Sutta, SN 22.129)에서는 ‘뿌툿자노(puthujjano)’라는 말을, “무지한 사람(뿌툿자노, puthujjano)는 다섯 무더기에 관한 즐거움, 결함(문제점)/위험함, 및 그로부터 벗어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로 정의합니다.

  • * 아리야 뿍갈라(Ariya puggala)는 (소따빤나 아누가-미, 소따빤나, 사까다-가-미 아누가-미, 사까다-가미, 등) 8 레벨로 삿따(satta) 상태를 극복합니다.

  • * 또한, 보디삿따(Bodhisatta)는 아직 삿따(satta)이지만, 보디(Bodhi), 즉 붓다후드(Buddhahood)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보디삿따(Bodhisatta)는 일부 [지능이] 높은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지만, 나머지 3가지 악처에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 보세요.

  • * ‘satta’는 ‘saththa’로 발음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Tipiṭaka English” Convention Adopted by Early European Scholars – Part 1’와 그에 이어지는 ‘~ Part 2’를 참조하세요.

 

띨락카나를 이해함과 함께 ‘삿따’ 상태를 극복함

 

5. 다섯 무더기와 ‘다섯가지 집착 무더기’에 대한 분석을 사용하여 ‘31영역으로 된 이 세상에 내재된(고유한) 괴로움(고통)’에 대해 붓다께서 설명하신 것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은 띨락카나(Tilakkhana),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옵니다. 이제 다섯 무더기와 띨락카나(Tilakkhaṇa) 사이의 연결(연관)을 살펴 보겠습니다.

 

  • * 아수바(asubha)라는 네 번째 특성이 일부 숫따(sutta)에서 나타납니다.

  • * 그러나, 대부분의 숫따(sutta)에서는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라는 세 가지 특성만 논의됩니다.

  • * 그 특성의 본질은 ‘나’라는 인식과 함께 세상 것(루빠, rupa)에 대해 갈망하는 것은 더 많은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는 재탄생 과정을 영속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그것을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 * 그러나 우리가 배운 핵심 개념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낫따(anatta)와 아닛짜(anicca)에 대해 간략히 논의해 봅시다.

 

아낫따가 무아(No-Self)를 의미하는가?

 

6. 모든 유정체가 다섯 무더기를 가진 것으로 표현된 것은 영구적인 영혼(soul)이나 아-뜨마(ātma)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 * 논의한 바와 같이, 그 다섯 무더기 중의 어느 것도 본질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잠깐 동안에도 계속 변합니다. 특히 유정체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할 때 그것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런 전환은 우리의 깊은 과거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26가지 영역에 태어난 적이 있습니다(31영역 중에서 아나-가미 성자만이 그들을 위해 예약된 5가지 영역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 * 우리 모두는 가장 낮은 니라야(niraya, 지옥) 영역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nevasaññanasaññayatana, 비상비비상처) 브라흐마 영역에 태어난 적이 있습니다. 

  • * 영혼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핵심’이나 ‘본질’이 있다면, 아라한은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라한의]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이후에는 31영역의 어떤 영역에도 아라한의 흔적이 없습니다.

  • * 그러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자아(self)’나 ‘나(me)’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가띠(gati) 세트를 가진 ‘나(me)’ 또는 ‘자아(self)’라고 하는 견해와 인식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 흐름(lifestream)’이 있습니다.

  • *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 단계부터, 사람은 그 모든 행위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볼(알) 수 있습니다. ‘아윗자-(avijjā)’를 통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생성하는 ‘가띠(gati)’를 가진 ‘자아(self)’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윗자-(avijjā)’는 더 높은 막가 팔라(magga phala, 도과)에 이르게 됨에 따라 감소할 것입니다. 아라한(Arahant) 단계에서만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가 완전하게 되고(완성되고) ‘나(me)’라는 인식이 사라집니다.

 

아닛짜가 무상(Impermanence)을 의미하는가?

 

7. 요즘 빠알리어 ‘아닛짜(anicca)’가 ‘무상(impermanence)’으로 번역된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합니다. 간단한 숫따(sutta)를 보면 그런 번역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 예를 들어, 그 중에서 난딕카야 숫따(Nandikkhaya Sutta, SN 22.51)는 “아닛짠네와, 빅카웨, 빅쿠 루-빵 아닛짠띠 빳사띠. 삿-사 호띠 삼마-딧티.(Aniccaññeva, bhikkhave, bhikkhu rūpaṃ aniccanti passa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루빠(rupa, 형상)를 아닛짜(anicca)로 보는 빅쿠(bhikkhu)는 아닛짜 특성은 보았다. 그는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가 있다.”입니다.

  • *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그 구절을 “형상(form)을 무상한(impermanent) 것으로 보는 빅쿠는 아닛짜 특성을 보았다. 그는 삼마- 딧티가 있다”로 잘못 번역합니다.

  • * 모든 명성있는 과학자도 이 세상의 어떤 물질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Scientific American’ 기사인 ‘The Only Thing That Remains Constant Is Change’를 참조하세요. 그것이 그 과학자들이 모두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를 가지고 있고 닙바-나(Nibbāna)를 얻었음을 의미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닛짜(anicca)’는 ‘무상(impermanence)’만을 의미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 * 아낫따(anatta)와 아닛짜(anicca)의 진정한 의미를 이 시리즈의 향후 포스트에서 상세히 논의하겠습니다.

 

편견 없이 띠삐따까를 조사(검토)하는 것이 필요함

 

8. 그런 잘못된 번역을 진실(진리)인 것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보다는 이런 문제는 상식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그러한 진술이 ‘유명한 책’에 있거나 ‘유명한 비구/학자의 의견’이라고 해서, 그것이 띠삐따까(Tipiṭaka)와 서로 잘 맞다(호환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데와닷따(Devadatta)가 신통력(abhiññā power)을 가진 빅쿠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르주나(Nagarjuna)와 붓다고사(Buddhaghosa)는 재탄생을 믿지도 않는(따라서 ‘밋차- 딧티’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학자’로 간주됩니다.

 

  • * 그들의 의도는 좋을지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증거로 명확해지면 자신의 생각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 * [잘못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할 ‘잘못된 담마(Dhamma)’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세간의 법을 모른다고 해서 법정에서 변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참된) 가르침’을 모른다고 해서 변명이 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띠삐따까(Tipiṭaka)의 증거로 올바른 가르침이 분명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 * ‘무상(impermanence)’은 아닛짜(anicca)에 대한 넓은 의미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의 영어 낱말로는 ‘아닛짜(anicca)’라는 용어(낱말)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빠알리(Pāli) 용어(낱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용어(낱말)를 사용해야 합니다.

 

유정체는 왜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가?

 

9.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 * ‘어떤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서는 ‘나(me)’ 또는 ‘자아(self)’가 있어야 합니다.

  • * 5가지 육체적 감각을 통해 5가지 유형의 외부 루빠(external rupa)와 접촉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루빠 루빠(rupa rupa) 또는 완나 루빠(vaṇṇa rupa) (물질 대상), 삿다 루빠(sadda rupa) (소리), 간다 루빠(gandha rupa) (냄새), 라사 루빠(rasa rupa) (맛), 뽓탑바(phoṭṭhabba) (몸 감촉)입니다. 또한, 그 루빠(rupa)들은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을 주도록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런 즐거움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고통/괴로움을 겪습니다).

 

  • * 위의 두 가정이 모두 궁극적 실재에서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분투는 더 많은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 두 가지 가정은 부처님에 따르면 잘못되었다

 

10. 붓다께서는 그 두 가지 특징(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지적을 하셨습니다.

 

  • * 궁극적 실재에서는 ‘나(me)’ 또는 ‘불변하는 자아’가 없습니다. 모든 유정체는 한정된 수명을 가지고 그 존속 중에 예기치 않는 변화를 겪습니다. 어떤 존재에도 (‘영혼’ 또는 ‘아-뜨마’와 같은) ‘핵심’ 또는 ‘실체’가 없습니다. 주어진(특정) 생명흐름은  어떤 존재(때)에는 브라흐마(범천), 데와(천신), 또는 인간일 수 있고, 다른 존재(때)에는 동물, 아귀, 지옥 중생일 수 있습니다. 어디에 핵심이 있을까요?

  • * 이 세상의 모든 유형의 외부 루빠(external rupa)는 수명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존재하는 동안 예기치 않는 변화를 겪습니다. 그래서, 큰 노력을 기울여 얻은 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한, (집, 자동차, 자신의 신체 등을 생각해 보면)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부담이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지각(인식)되기 위한 요구 조건(‘불변하는 자아’와 ‘안정된 외부 루빠’)은 모두 환상입니다..

 

  • * 그것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담마(pubbe ananussutesu dhammesu, 붑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을 밝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자아와 외부 루빠는 공통 명칭 ㅡ 상까따를 가진다

 

11. 상까따(Sankata)는 핵심 빠알리(Pāli) 용어입니다. 그것은 ‘산(san)’ + ‘까따(kata)’에서 유래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많은 빠알리(Pāli) 용어와 마찬가지로 어근 ‘산(san)’이 거기에 있습니다. 상까따(sankata)는 ‘산(san)’, 즉 일시적인 존재일 뿐인 것들을 ‘축적’하려는 우리의 경향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유정체와 이 유정체가 즐기는 것은 모두 상까따(sankata)입니다.

 

  • * 둘 다 위 #9 및 #10에 따라 자연에 대한 그 2가지 잘못된 견해에 기초한 결실(실속)없는 행위로 인해 일어납니다. ‘일어남’에 대한 빠알리 용어는 ‘사무다야(samudaya)’입니다. 핵심 빠알리 용어인 ‘사무다야(samudaya)’는 ‘산(san)’ + ‘우다야(udaya)’에서 유래하며, ‘산(san)으로 인한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의 의미’와 ‘List of “San” Words and Other Pāli Roots’ 포스트로 기억을 새롭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 두 가지 유형의 상까따(sankata)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하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일반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samudaya, 사무다야).

  • * 많은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모든 괴로움(고통)에 대한 근본 원인은 아윗자-(avijjā)로 인해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고통)의 기원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실재 본성, 즉 띨락카나(Tilakkhaṇa)에 대한 무지(아윗자-, avijjā)입니다. 그것이 다섯 무더기와 띨락카나(Tilakkhaṇa) (그리고 고통/괴로움) 사이의 연결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것도 추측(추정)하지 않는다

 

12. 고따마 부처님과 같은 삼마삼붓다(Sammasambuddha)께서는 직접 경험/확인(검증)하지 않으신 것은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 * 띠삐따까(Tipiṭaka, 빠알리 삼장)에 있는 여러 숫따(sutta)에서 그것에 대해 논의합니다. 예를 들어, 위-맘사까 숫따(Vīmaṃsaka Sutta, MN 47)를 참조하세요.

  • * 띠삐따까(Tipiṭaka)에는 부처님과 일부 제자들이 브라흐마(Brahma) 영역과 데와(Deva) 영역을 방문한 것을 묘사하는 숫따(sutta)가 많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 중 하나인 ‘브라흐마니만따니까 숫따(Brahmanimantanika Sutta, MN 49)에 대해 ‘아니닷사나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 *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보통 사람(뿌툿자노, puthujjano)이 인식할 수 없는 측면(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현상 중 많은 것은 길(팔정도)을 따라 진전을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검증(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또한 현대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일치합니다. 필자는 그것들 중 일부를 ‘불교에서 신비 현상?’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 *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독특함을 보지(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부처님은 또 다른 철학자일 뿐입니다. 그 가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것도 추측(추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론, 각자가 그것을 확인(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필자가 띠삐따까(Tipiṭaka) 내에서 그리고 과학의 많은 새로운 발견으로 puredhamma.net 사이트에서 자기 일관성(self-consistency)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다섯 무더기와 띨락카나(Tilakkhaṇa) (그리고 괴로움/고통) 사이의 연결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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