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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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성스런 진리는 괴로움만 나타내는가?

 

원문 : Key Dhamma Concepts 카테고리의 ‘Does the First Noble Truth Describe only Suffering?’ 포스트

- 2018년 10월 24일 개정; 2019년 8월 5일 재작성; 2022년 7월 28일 개정

 

둑카(Dukkha)와 둑카 삿짜(Dukkha Sacca) 사이의 차이

 

1. 붓다 담마(Buddha Dhamma)는 자연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둑카 삿짜(dukkha sacca, 첫 번째 성스런 진리)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겉보기 행복이 많이 있으며, 그것은 너무 늦을 때까지 사람들이 숨겨진 괴로움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 * 핵심은 감각적 즐거움에 숨겨진 괴로움을 보기위해 빤냐(panna, 지혜)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간주하고 고통스런 느낌을 극심한 괴로움으로 간주합니다! 필자는 빅쿠니 아라한의 읊은 ‘Verses of the Elder Sumedhā’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합니다. 다음 구절은 많은 통찰력 있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은 창, 질병, 종기, 재앙, 질환의 지지대과 같습니다. 불구덩이처럼 재앙, 두려움, 파괴의 근원입니다.”

  • * 비록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괴로움을 조사(검토)할 자극을 주기는 할지라도, 둑카 삿짜(dukkha sacca,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통/괴로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2. 괴로움(느낌, 웨다나_vedana)과, 그것의 원인을 이해하는 능력(지혜, 빤냐_panna)은 서로 다릅니다. 후자는 미래의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제1성제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 * 괴로움에 대한 빠알리(pāli) 낱말은 두카(dukha)입니다. 반면에 둑카(dukkha)(2개의 k가 있음)는 ‘두카(dukha) + 카(kha)’로, ‘세상에 두카(dukha)가 있지만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두카(dukha)의 제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띠삐따까(Tipitaka)의 대부분의 곳에서, 둑카(dukkha)가 괴로움의 의미를 전하지만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 * 두카(dukha, 괴로움)는 수카(sukha, 즐거움)의 반대말입니다. 이것은 여러 숫따(sutta)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라 숫따( ‘Bhāra Sutta, SN 22.22’ )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바-라- 하웨 빤짝칸다-,

바-라하-로 짜 뿍갈로;

바-라-다-낭 두캉 로께,

바-라닉케빠낭 수캉”.

(“Bhārā have pañcakkhandhā, 

bhārahāro ca puggalo;

Bhārādānaṃ dukhaṃ loke,

bhāranikkhepanaṃ sukhaṃ”.)

 

번역: “5가지 무더기(오온)는 짐이고,

짐을 나르는 자는 사람이다;

짐을 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괴로움이고,

짐을 내려놓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 * 물론, 둑카(dukkha)라는 말은 대부분의 숫따(sutta)에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붓다 담마(Buddha Dhamma)의 모든 것, 즉 ‘괴로움(고통)의 제거’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5가지 무더기(오온)가 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세상의 대상(루빡칸다, rupakkhandha)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웨나나-_vedanā, 산냐-_saññā, 상카-라_sankhāra, 및 윈냐-나_viññāna의 무더기)을 갈망합니다.

 

  • * 도처에 한바탕 행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괴로움(고통)같이 느껴진다면, 모두가 닙바-나(Nibbāna)를 추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한바탕 행복)에서 실제 괴로움(고통)을 보기조차 어렵습니다.

 

4. 겉보기(외견상) 즐거움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가립니다(감춥니다). 인간계에는 괴로움과 행복이 있으며, 우리는 둘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 * 인간계보다 높은 영역에서 고통은 상대적으로 훨씬 적으며, 그렇기 때문에, 데와-(devā, 천신)들은 닙바-나(Nibbāna)에 대해 생각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데와-(devā)와 브라흐마(Brahma, 범천)들도 가장 낮은 4개 영역[에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영역에서든 각 탄생은 죽음으로 끝나며, 그것은 재탄생 과정(윤회)에 있는 한 피할 수 없습니다.

  • * 가장 낮은 4개 영역(apāya, 아빠-야, 악처)에 있는 유정체는 많은 두카(dukha)를 경험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둑카 삿짜(Dukkha Sacca, 괴로움의 진리)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핵심은 재탄생 과정(윤회)에서 각 유정체는 다른 영역들에 비해 아빠-야(악처, 사악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재탄생 ㅡ 제1성제의 괴로움과 관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것이 재탄생 과정(윤회)이 고통(괴로움)으로 가득찬 이유입니다. 희소식은 그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둑카(Dukkha)의 성스런 진리’는 무엇인가?

 

5. 붓다께서 ‘담마 짝까 빠왓따나 숫따(Dhamma Cakka Pavattana Sutta, 지혜로 존재의 진정한 특성을 보는 길에 대한 경)’에서 괴로움에 대한 첫 번째 성스런 진리를 어떻게 묘사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이담 코 빠나, 빅카웨, 둑캉 아리야삿짱ㅡ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브야-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ㅡ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 * 둑카(dukkha)의 이 정의를 단계별로 살펴 보겠습니다.

 

6. 첫 번째 부분은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브야-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입니다. 

 

번역: “태어남은 (극복될 수 있는) 괴로움이다. 늙는 것은 (극복될 수 있는) 괴로움이다. 병듬은 (극복될 수 있는) 괴로움이다. 죽음은 (극복될 수 있는) 괴로움이다.” 

 

  • * ‘태어남’ 이외의 다른 것들(늙는 것, 질병, 및 죽음)은 괴로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 그러나, 다른 세 가지 유형의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은 각 태어남에 붙어 있습니다.

  • * 또한, 다른 세 가지 유형의 괴로움은 태어남, 즉 재탄생 과정(윤회)을 멈추지 않고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 *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알기 쉽지만, 이해하려면 훨씬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합니다.

 

7. 붓다께서는 그 다음 구절에서 둑카(dukkha)를 명확하게 하셨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입니다. 그 의미는 “좋아하지 않는 자(것)와 함께 있으면 괴로움(또는 슬픔)을 가져오고, 좋아하는 자(것)와 떨어지면 괴로움(또는 슬픔)을 가져온다”입니다.

 

  • * 우리 모두는 이 첫째 패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즐겁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직업(일) 등을 가지는 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 * 물론, 반대도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야 할 때 슬픔을 가져오고, 좋아하는 직업이나 대상을 잃게 될 때도 슬픔을 가져옵니다.’

 

둑카(Dukkha)는 아닛짜(Anicca) 특성으로 인해 일어난다

 

8. 그 다음, “얌 삐 잇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yam pi 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을 줄인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yampiccham na labhati tampi dukkham)’이 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닛짜(anicca), 둑카(dukka), 아낫따(anatta) 및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 samuppada, ‘pati + iccha’와 ‘sama + uppāda’)에서 접한 ‘잇차(iccha, ‘icca’와 동일)’를 봅니다. 그리고, ‘라바띠(labhati)’는 ‘얻음’을 의미하고, ‘나 라바띠(na labhati)’는 ‘얻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잇차(iccha)(싱할라어로 ඉච්ඡ)는 잇짜(icca, 좋아함)(싱할라어로 ඉච්ච)를 강조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 * 번역: “원하는 또는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고통에 이르게 된다”

  • * 또한 아닛짜(anicca)는 ‘나(na)’ + ‘잇짜(icca)’, 즉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아닛짜(anicca)는 자연의 세 가지 특성(Tilakkhana) 중 첫  번째입니다.

  • * 따라서, 이것은 아닛짜(anicca) 특성에 대한 진술입니다. 즉,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탄생 과정(윤회)에서는 결국 괴로움(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 괴로움(고통)은 재탄생 과정(윤회)이 끝나야만 끝납니다.

 

9. 같은 개념이 야다닛짜 숫따( Yadanicca sutta, SN 22.15 )에 “야다닛짱 땅 둑캉, 양 둑캉 따다낫따-(yadaniccam tam dukkham, yam dukkham tadanattā).” 구절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야드 아닛짱 땅 둑캉, 양 둑캉 따드 아낫따-(yad aniccam tam dukkham, yam dukkham tad anattā.)”를 줄인 것입니다. 

번역: “어떤 것이 아닛짜(anicca)이면, 둑카(dukkha)가 일어나고, 자신은 무력하게 된다(아낫따, anatta)."

 

  • * 물론,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은 그 구절의 첫 부분인 “야드 아닛짱 땅 둑캉(yad aniccam tam dukkham)”에 해당합니다.

 

감각적 즐거움은 미래 괴로움의 원인이다

 

10.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는 괴로움(고통)만 있다’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한바탕의 ‘겉보기(외견상) 행복’은 진짜 괴로움(고통)을 계속 감춥니다. 우리는 항상 밝은 면을 보려고 하고, 우리 사회도 또한 거기 있는 고통과 괴로움의 대부분을 덮으려고 합니다.

 

  • * 고통과 행복이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핵심은 겉으로 보이는 즐거움에 가려진 고통과 괴로움을 보는 것입니다.

  • * 붓다께서는 ‘Hook/Baḷisa Sutta (SN 17.2)’에서 비유로 묘사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 때, 맛있는 음식 약간만 보고 낚시바늘과 낚시줄과 낚시대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춰진 고통(낚시바늘)이 있는 ‘전체 그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붓다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그것(전체 그림)을 드러내실 때까지,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감각 즐거움에 숨겨진 고통과 괴로움을 볼 수 없습니다.

  • * 모든 감각적 즐거움에는 숨겨진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자의) 각 단계들을 통해서만 볼/깨달을 수 있습니다. 소-따빤나 단계에서는 강한 탐욕과 강한 증오만 기꺼이 포기됩니다. 모든 갈망은 아라한 단계에만 제거됩니다. 

 

11. 텔레비젼에서, 우리는 대부분 매력적인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아름다운(매력적인)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늙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 * 우리 모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런 피할 수 없는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중에는 우리들이 만족하는 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 또한, 31영역으로 된 더 넓은 세상에는 고통(괴로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인간계 위의 영역에는 훨씬 더 많은 행복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행복은 일시적입니다). 그리고 하위 4가지 영역, 특히 가장 낮은 니라야(niraya, 지옥)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괴로움)이 있습니다.

 

아닛짜(Anicca) 이해에 있어서 재탄생 과정(윤회)의 필요성

 

12. 위 8번에서 10번까지 논의된 구절들은 아닛짜(Anicca) 특성을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만족하는 대로 유지할 수 없으며, 그것이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야드 아닛짱 땅 둑캉(yad aniccam tam dukkham)”이며, ‘아닛짜, 둑카, 아낫따 - 잘못된 해석’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 * 숫따(sutta) 후반부에 “…둑코- 아나리요- 아낫따 삼히또-(...dukkhō anariyō anatta samhitō)”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아낫따(anatta), 즉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이 9번에 있는 구절의 “양 둑캉 따드 아낫따(yam dukkham tad anatta)” 부분입니다.

  • * 이러한 개념은 아낫따 락카나 숫따(Anatta Lakkhana Sutta) (‘담마 짝까 빠왓따나 숫따’ 후에 설해진 두 번째 숫따)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습니다.  ‘아낫따 - 이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음’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아닛짜, 둑카, 아낫따(Anicca, dukkha, anatta)’는 붓다 만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비전(vision)’입니다. ‘담마 짝까 빠왓따나 숫따(Dhamma Cakka Pavattana sutta)의 시작 부분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pubbe ananussutesu dhammesu...)’입니다.

 

13. 우리가 31 영역, 재탄생 과정, 업의 법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연기(paticca samuppada)로 ‘이 세상’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그러면(이 세상의 큰 그림을 이해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유정체가 무지 때문에 하위 4개의 영역(사악처)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 지구에는 단지 70억 정도의 사람들이 있지만, 각자는 수백만의 생물을 우리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신의 몸에는 지구상의 사람 수만큼 많은 생명체가 있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가정에는 4-6명의 사람이 있겠지만, 그 집과 마당에는 얼마나 많은 생물체가 있을까요? 수백만, 아마도 수십억의 생물체가 있을 것입니다. 한 덩어리의 흙에는 수천 마리의 작은 생명체가 있습니다.

 

14. 둑카(dukkha)(멈춰질 수 있는 dukha)의 개념은 재탄생 과정(윤회)의 맥락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태어남과 관련된 고통(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 * 현재의 삶은 이미 시작되었고(이것은 과거 깜마의 결과입니다), 육체를 유지하는 업력이 다 소진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질병, 부상 등과 관련된 고통(괴로움)만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시작된 삶과 관련된 고통(괴로움)입니다..

  • * 그러나, 그러한 미래의 고통(괴로움)은 재탄생 과정(윤회)을 중단함으로써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둑카 삿짜(Dukkha Sacca)입니다.

 

오온 - 만족하는 대로 유지되기를 좋아하는 것 

 

15. 마지막으로, #5에 있는 구절의 마지막 줄은 그 모두를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라고 요약합니다.

 

번역 : "멈춰질 수 있는 괴로움(고통)은 5가지 무더기(오온)에 대한 갈망 때문에 일어난다.”

 

  • *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갈망하는 것은 ‘루빠(rupa),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nkhāra), 및 윈냐-나(viññāna)’라는 5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과 다른 무정체 또는 유정체의 몸을 우리가 만족하는 대로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nkhāra), 및 윈냐-나(viññāna, 생각)를 우리가 만족하는 대로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 * 다시 말해, 우리가 갈망하는(잇짜, icca) 것, 따라서 우빠-다-나(upādāna)가 있는 것은 5가지 무더기(pancakkhandha, 빤짝칸다)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빤짝칸다(pancakkhandha)의 ‘부분’을 빤쭈빠-다-낙칸다 (pancupādānakkhandha, panca + upādāna + khandha)라고 합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갈망하고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산(san, 윤회가 계속되게 하는 행)’을 하기 때문에 두카(dukha, 고통 또는 느껴진 웨다나-)가 일어납니다.

 

  • * 다시 말하면, 우리는 ‘루빠(rupa),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nkhāra), 윈냐-나(viññāna)’가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단지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최종적으로는 고통(괴로움)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실제 본질, 즉 아닛짜(anicca) 특성은 둑카(dukkha)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여 그러한 갈망을 멈춤으로써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

  • * 이 진리(둑카 삿짜, dukkha sacca)는 지혜(빤냐, paññā)를 기르므로써,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이해함으로써 깨닫습니다. 이해가 갈 때까지 이것을 다시 읽어보세요. 그것은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pubbe ananussutes dhammesu…)”입니다. 그것은 부처님만이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살아있는 아라한은 빤짝칸다를 가지지만 빤쭈빠-다-낙칸다는 가지지 않는다

 

17. 자연의 실제 특성을 깨닫게 되면 갈망(탕하-로 인한 우빠-다-나)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뒤이어 31영역에서 벗어남(해방됨), 즉 닙바-나(Nibbāna)에 이릅니다.

 

  • * 따라서, 빤쭈빠-다-낙칸다(pancupādanakkhandha)가 단지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될 때(즉, ‘세계가 이전과 같이 존재’하더라도 ‘들러붙음_집착’이 없음), 아라한이 됩니다. 물론, 육체가 죽을 때, 그 아라한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모든 괴로움이 멈춥니다.

  • * 이 갈망은 억지로 강제해서는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지혜(빤냐-)를 개발함에 따라 (갈망을 포기할 때에) 생기는 이점을 마음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아닛짜 - 진정한 의미(Anicca – True Meaning)’ 서브 섹션과 ‘아낫따 - 체계적 분석(Anattā – A Systematic Analysis)’ 서브 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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