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google":["PT Serif","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Nanum Barun Gothic"]}

 

앗따 ㅡ 두 가지 매우 다른 의미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Atta – Two Very Different Meanings’ 포스트

- 2020년 7월 1일 작성

 

먼저, ‘앗따, 앗따-’(atta, attā)는 ‘멧따, 멧따-’(metta, mettā)에서와 같이, ‘th’ 음으로 발음됩니다. ‘Tipiṭaka English” Convention Adopted by Early European Scholars – Part 1’ 포스트의 #12를 참조하세요.

 

영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낱말

 

1. 많은 영어 낱말들이 철자가 같고 발음도 같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mine’이라는 낱말을 생각해 봅시다.

 

  • * ‘mine’이라는 낱말은 소유격 형용사입니다. 예를 들어, ‘That house is mine’는 ‘그 집은 내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 ‘mine’은 또한 명사입니다. 그것은 땅에서 광물(석탄, 금 등)을 캐내는 곳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 * ‘mine(또는 landmine)’은 또한 땅 속에 묻혀 있는 폭탄(지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누군가 그 위를 밟거나 차로 운전하여 가면 폭발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전쟁에 사용됩니다.

  • * 그와 같은 다른 낱말들도 많이 있습니다. 문맥(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간단한 낱말로 ‘right’가 있습니다. 그것은 “turn right at the traffic light.(교통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세요.)”에서는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옳다(바르다)’를 의미하는 “you are right.”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합니다.

 

앗따(및 앗따-) ㅡ 두 가지 매우 다른 의미

 

2. 많은 빠알리(Pāli) 낱말에는 이중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많은 빠알리(Pāli) 낱말은 평범한 의미와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 * 붓다 담마를 잘 이해한 후에야, 주어진 문맥에서 어떤 의미가 적절한지 잘 알게 됩니다. 붓다 담마를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특히 실천과 함께 잘 이해됩니다.

  • * 그렇기 때문에 빠알리(Pāli) 사전들에만 의지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Pāli Dictionaries – Are They Reliable?’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빠알리 낱말 ‘앗따(atta)는 자주 사용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람’ 또는 ‘자아(self)’를 뜻하는 평범한 의미입니다. 먼저 그것에 대해 논의합시다. 

 

평범한 용법에서 사람 또는 자아를 의미하는 앗따

 

3. 띠삐따까(Tipitaka)의 많은 구절에서, 앗따(atta)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몇 가지 예입니다.

 

  • * 담마빠다(Dhammapada) 게송 6.80에서 “앗따-낭 다마얀띠 빤디따-(Attānaṃ damayanti paṇḍitā)”는 “현명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다스린다”를 의미합니다.

  • * 담마빠다(Dhammapada) 게송 21.291에서 “앗따노 수카밋차띠(Attano sukhamicchati)”는 “각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를 뜻합니다. 또한, ‘수카밋차띠(sukhamicchati)’는 ‘수캄(sukham)’ + ‘잇차띠(icchati)’로 합성된 낱말로서, 그 속에 잇짜(icca, 바램)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 * 앗따디-빠 숫따(Attadīpa Sutta, SN 22.43)에서, “앗따디-빠- 위하라타(attadīpā viharatha)”는 “그대 자신의 섬을 만들라”를 뜻하며, “각자는 자기 자신의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양한 잘못된 견해는 ‘사람’ 또는 ‘자아’에 기반된다

 

4. 사람들은 항상 ‘나’처럼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나’, ‘자아(self)’, 또는 ‘앗따-(attā)를 어떻게 정의할까?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아(self)’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결론이나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됩니다.

 

  • * 브라흐마자알라 숫따(Brahmajāla Sutta, DN 1)에서 붓다께서는 사람들이 가지는 62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를 묘사하셨습니다. 

  • * 이 모든 잘못된 견해는 주로 두 가지 범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다른 견해들은 이 두 가지의 변형입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용어로, 우리는 그 두 범주를 다음과 같이 나열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구적 영혼(삿사따 와-다, Sassata Vāda):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Abrahamic religion)에서 특정 사람은 영구적인 영혼(힌두교에서는 ‘아-뜨마_ātma’ 또는 ‘아-뜨만_ātman’)을 가진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soul)’ 또는 ‘아-뜨마(ātma)는 또 다른 존재를 잡게(갖게) 된다.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에서 그 다음 존재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 힌두교에서는 많은 환생을 겪고, 마침내 마하- 브라흐마(Mahā Brahma)에 합쳐져서 영구적인 존재가 된다.

 

유물론적 견해(웃체다 와-다, Uccheda Vāda): 현생이 끝나면, 더 이상 미래 생이나 미래 존재가 없다. 물질적 몸(육체)이 오로지 (뇌에서) 우리 생각을 생성하는 원인이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5. 삿사따 와-다(sassata vāda)를 묘사하는 구절: “따뜨라, 빅카웨, 예 떼 사마나브라-흐마나- 삿사따와-다- 삿사땅 앗따-난짜 로깐짜 빤냐뻰띠 ..(Tatra, bhikkhave, ye te samaṇabrāhmaṇā sassatavādā sassataṃ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 ..)” 

그 의미는 “그 금욕주의자들과 브라만들이 자아(self)와 우주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때 ..”입니다.

 

  • * 삿사따(sassata)는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웃체다 와-다(uccheda vāda)를 묘사하는 구절: “따뜨라, 빅카웨, 예 떼 사마나브라-흐마나- 웃체다와-다- 삿또 삿땃사 웃체당 위나-상 위바왕 빤냐뻰띠 ..(Tatra, bhikkhave, ye te samaṇabrāhmaṇā ucchedavādā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apenti ..)”

그 의미는 “그들은 현 존재의 전멸을 주장한다..”입니다.

 

  • * 웃체다(uccheda)는 ‘끝남’ 또는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유물론자들은 우리가 단지 이생(현생)만 산다고 믿습니다.

 

앗따의 ‘평범한 의미’에서, 아낫따는 그 반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6. 그러므로, 위의 모든 경우에서 ‘앗따(atta)’라는 낱말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자아(self)’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 * 간단히 말해서, 유물론자들은 ‘자아(자기)’는 오직 이생(현생)만을 가진다는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 * 다른 진영의 사람들은 ‘영혼(soul)’이 영원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 * 붓다께서는 두 견해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자아(self)’는 적절한 원인과 조건이 있는 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soul)과 같은 ‘영구적 자아(permanent self)’는 없습니다.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재탄생이 일어나는 그 원인과 조건을 제거했습니다.

  • * 두 경우 모두 ‘아낫따(anatta)’(또는 ‘아낫따_anattā’)라는 낱말은 ‘사람’을 의미하는 앗따-(attā)의 반대를 나타내는 데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 ‘아낫따(anatta)’라는 낱말은 ‘자아(자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난다 숫따(Ānanda Sutta, SN 44.10)에서 왓차곳따(Vacchagotta)는 부처님에게 “고따마 스승님, ‘자아(self)’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아(self)’가 있는지 묻기 위해 ‘앗티 앗따-(atthi attā)’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그것을 반대로 표현하여 “자아(self)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아(self)가 존재하지 않는지 묻기 위해 ‘나 앗티 앗따-(na atthi attā)’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아낫따(세간적 해석) -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제, ‘앗따-(attā)’의 절대적 의미 또는 궁극적(paramattha) 의미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앗따-(attā)의 반대, 즉 아낫따(anatta)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나타냅니다. (i) 모든 세상 것은 본질(실속, 결실)이 없다. (ii) 그 세상 것에 들러붙으면, 결국 어찌할 수 없이 난감하게 된다. 이 의미들은 자연의 세가지 특징, 즉 띨락카나(Tilakkhana)의 맥락(문맥)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연의 특성으로 아낫따 ㅡ 세상 것에는 본질적인 것이 없다

 

7. ‘아낫따(anatta)’라는 낱말의 이 용법은 이 세상 것을 가리켜 ‘피난처 없음’ 또는 ‘본질(실속)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또한 탐욕(갈망)으로 세상 것들을 추구한다면 결국 어찌할 수 없이 난감하게 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피난처 또는 본질(실속)이 있는 앗따(atta)의 심오한 의미를 수반합니다.

 

  • * 아낫따(anatta) 특성을 극복함으로써 안전하고 보호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닙바-나(Nibbāna)입니다. 닙바-나(Nibbāna)만이 ‘앗따(atta)’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 이 맥락에서,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라는 세 낱말은 이 세상의 특성을 묘사합니다. 그것들은 ‘자아(self)’라는 맥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 간단히 말하면, 아닛짜(anicca)는 ‘세상 것’이 결국은 어떤 누구에게도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세상 것’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 속성도 포함하는데, 그 중에는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윈냐-나(viññāṇa)가 있습니다.

  • * 누군가 그것들은 갈망하고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그 사람은 미래의 고통(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그 욕망은 결국 채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괴로워할 것입니다. 둘째, 그것들을 갖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하면 (나쁜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런 행위의 나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 * 따라서 결국 세상 것에 대한 들러붙음은 본질(실속)이 없습니다. 그러한 분투는 헛되고 결실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분투 노력을 추구한다면 난감하게 될 것입니다.

 

아낫타와 앗타는 아낫따와 앗따의 강한 버전이다

 

8. 이전 포스트에서, 잇차(iccha)와 아닛차(aniccha)라는 낱말은 잇짜(icca)와 아닛짜(anicca)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만 더 강한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잇짜, 닛짜, 아닛짜 ㅡ 중요한 관계’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마찬가지로, 현재 문맥에서 ‘앗따(atta)’와 ‘아낫따(anatta)’는 ‘앗타(attha)’와 ‘아낫타(anattha)’로 표시되는 더 강한 버전이 있습니다.

  • *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에서, 붓다께서는 까-마수칼리까-누요가(kāmasukhallikānuyoga) 또는 앗따낄라마타-누요가(attakilamathānuyoga)를 하는 사람을 아낫타상히또(anatthasaṃhito)라고 묘사하셨습니다.

  • * 숫따(sutta)의 시작 부분에 있는 구절은, “요 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Yo cāya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입니다.

  • * 여기서, ‘아낫타상히또(anatthasaṃhito) (anattha + san + hito)라는 낱말은 아나리야(anariya), 즉 무지한 보통 사람은 잘못된 견해 때문에 난감하다는 의미입니다. 

 

9. 또한, ‘앗타(attha)’는 맥락(문맥)에 따라 ‘진실’(싱할라어로는 ‘artha’)을 나타내고, ‘아낫타(anattha)’는 ‘진실 없음 또는 쓸모 없음’(싱할라어로는 ‘anartha’)을 나타냅니다. 이 낱말들의 어느 것도 ‘자아’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 * 위 구절은 또한 쓸모없는 활동(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거나 자기 고행이라는 또 다른 극단으로 가는 것)을 하는 아나리야(anariya)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두 활동 모두 의미 또는 본질(실속)이 없습니다.

 

아닛짜, 둑카, 아낫따 ㅡ 이 세상의 밀접하게 관련된 특성

 

10.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는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 맥락에서 ‘아낫따(anatta)’라는 낱말은 ‘자아(self) 없음’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어진(특정) 사람은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지는 ‘아닛짜(anicca) 특성을 가지는 것’에 들러붙음으로써 아낫따(anatta, 난감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가 팔라(magga phala, 도과)를 성취한 사람은 그 난감한 상태를 극복했고, 피난처(atta, 앗따)가 있는 아리야(Ariya, 성자)가 되었습니다.

 

  • * 아닛짜(anicca), 둑카(dukha), 아낫따(anatta)의 반대(즉, 닛짜, 수카, 앗따)는 닙바-나(Nibbāna)의 특성입니다. ‘틸락카나 ㅡ 영어 법문’을 참조하세요.

  • * 31영역으로 된 이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합니다.

  • *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 본질을 먼저 깨달음으로써 닙바-나(Nibbāna)를 얻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성제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 * 그제서야 닙바-나(Nibbāna)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번째 성스런 진리가 성스런 팔정도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성스런 길은 삼마 딧티(Samma Ditthi)로 시작하는데, 삼마 딧티는 이 세상의 본질이 31영역으로 된 세상의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라는 명확한 시각(비전)입니다. 

 

부처님의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담마”

 

11. 그것은 붓다 담마(Buddha Dhamma)를 매우 간결하게 묘사한 것이며, ‘부처님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 *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이 세상에서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확고한 결심으로 노력을 기울이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있다는 것입니다.

  • *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십니다.

  • * 그러나 붓다께서는 그 겉으로 보이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에는 고통(괴로움)이 숨겨져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숨겨진 고통(괴로움)은 보기 어렵고,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붓다 담마(Buddha Dhamma)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확고한 결심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이해는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비유 ㅡ 앗수따와- 뿌툿자노는 맛있는 미끼를 무는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 

 

12.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하셨습니다. 물고기는 맛있는 미끼를 문다. 왜냐하면 그 안에 숨겨진 갈고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맛있는 미끼만 보고, 갈고리, 낚시줄, 낚시대, 및 그것을 잡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그 미끼에 가까이 가지도 않을 것이다.

 

  • * 같은 식으로, 오직 부처님만이 고통(괴로움)으로 가득한 사악처(가장 낮은 4가지 영역)를 포함한 31영역으로 된 ‘더 큰 그림’과 재탄생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더 넓은 세계관’을 모르기 때문에 유정체들은 그 사악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 * ‘앗수따와- 뿌툿자노(assutavā puthujjano, ‘무지한 평범한 인간’)은 그 숨겨진 고통(괴로움)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정체들은 사악처 안에서 대부분의 윤회 여정(여행)을 보냅니다. 그들은 거기에 갇혀 어찌할 수도 없이 난감하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아낫따(anatta), 즉 ‘피난처가 없게’ 됩니다.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 견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아닛짜, 둑카, 아낫따(Anicca, Dukkha, Anatta)’ 서브 섹션과, 최근에 개정된 서브섹션인 ‘다섯 무더기(오온)(The Five Aggregates, Pañcakkhandha)’에 있는 많은 포스트에서 그 3가지 낱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담마와 과학’ 섹션의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 서브 섹션에서 또 다른 접근으로 논의했습니다. 각 사람은 모두 다르며, 그 3가지 중의 한 특성이 주어진(특정) 사람에게 적합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들은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며, 모두 ‘자기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볼(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낫따가 ‘무아’를 의미하지 않는 증거

 

13.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āya)의 많은 숫따(sutta)에서,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SN 22, SN 23, SN 35를 들 수 있습니다.

 

  • * 예를 들어, 꼿티까아낫따 숫따(Koṭṭhikaanatta Sutta, SN 35.164)에서는, “짝쿠 코,  꼿티까, 아낫따-; 따뜨라 떼 찬도 빠하-땁보. 루-빠- 아낫따-; 따뜨라 떼 찬도 빠하-땁보. 짝쿠윈냐-낭 아낫따-; 따뜨라 떼 찬도 빠하-땁보. 짝쿠삼팟소 아낫따-;  따뜨라 떼 찬도 빠하-땁보. 얌삐당 짝쿠삼팟사빳짜야- 웁빳자띠 웨다이땅 수캉 와- 두캉 와- 아둑카마수캉 와- 땀삐 아낫따-; 따뜨라 떼 찬도 빠하-땁보 …(Cakkhu kho, koṭṭhika, anattā; tatra te chando pahātabbo. Rūpā anattā; tatra te chando pahātabbo.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tatra te chando pahātabbo. Cakkhusamphasso anattā; tatra te chando pahātabb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anattā; tatra te chando pahātabbo …)”라고 합니다.

 

번역:눈, 시각 대상, 눈-의식, 및 눈의 ‘산-접촉’(삼팟사, samphassa)은 본질(실속)이 없다: 그것들에 대한 욕망/갈망을 포기해야 한다. 눈의 ‘산-접촉’(삼팟사, samphassa)에 의해 조건화되어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고통스런(괴로운) 느낌, 또는 중립적인 느낌도 또한 본질(실속)이 없다. 그것에 대한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 * 그 다음 귀, 혀, 코, 몸, 및 마음에 대해 그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눈-의식이 ‘자아’를 가질 수 있는가?

 

14. 대부분의 다른 번역에서는 위에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그 모든 개체가 ‘비아(not-self, 자아 아님)’로 되어 있습니다. “눈, 시각 대상, 눈-의식(eye-consciousness), 및 눈 접촉(eye contact)비아(not-self)다…”로 번역된 With Koṭṭhita on Not-Self 를 참조하세요.

 

  • * ‘눈-의식(eye-consciousness)’이 어떻게 ‘자아(self)’를 가질 수 있을까요? ‘눈 접촉(eye contact)’이 어떻게 자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들이 ‘무아(no-self)’를 가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린아이 조차도 그 말은 말이 안되는 것(의미없는 것)이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낫따 특성을 지닌다

 

15. 실제로는, 위 #13의 숫따(sutta)에서 기술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낫따(anatta)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본질(실속)도 없습니다. 

 

  • * 그것은 모든 세상 것들의 아닛짜(anicca) 특성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만족할만하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고통만 겪을 뿐입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그것들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결국 나쁜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드 아닛짱 땅 둑캉(yad aniccaṃ taṃ dukkhaṃ)” 또는 “얌 삐 잇창 나 라바띠 땀 삐 둑캉(yam pi icchaṃ na labhati tam pi dukkhaṃ)” 구절은 그 사실을 나타냅니다.

  • * 그 과정은 점차 사람들을 점점 더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많은 고통(괴로움)이 함께 하는 아빠야(apayā, 사악처)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고, 그 시점에 사람은 정말로 어찌할 수도 없이 난감하게 될 것입니다(아낫따, anatta). 이것이 “양 둑캉 따드 아낫따-(yaṃ dukkhaṃ tad anattā)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 * “야드 아닛짱 땅 둑캉, 양 둑캉 따드 아낫따-(yad aniccaṃ taṃ dukkhaṃ, yaṃ dukkhaṃ tad anattā)”라는 구절은 띠삐따까(Tipiṭaka)의 수많은 숫따(sutta)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 세상 것들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게 유지될 수 없다(그것들은 ‘아닛짜_anicca’ 특성이 있다). 따라서, 부도덕한 수단을 사용하여 그런 것들을 유지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괴롭게 되고 많은 고통(둑카, dukkha)을 받게 된다. 그것은 불행하게 아빠-야-(apāyā, 사악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결국 어찌할 수도 없이 난감하게 된다(아낫따_anatta).”는 의미입니다.

  • * 그것이 바로 유정체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면서(부도덕한 행위를 함으로써) 재탄생 과정에서 어찌할 수도 없이 난감하게 되는 방식입니다.

  • * 그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담마’입니다.

{"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Nanum Barun Gothic"]}
{"google":["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