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니로-다 사마-빳띠, 팔라 사마-빳띠, 자-나, 및 자-나 사마-빳띠
원문 : Living Dhamma 섹션의 ‘Nirōdha Samāpatti, Phala Samāpatti, Jhāna, and Jhāna Samāpatti’ 포스트
2018년 2월 13일
1.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와 여러 팔라 사마-빳띠(phala samāpatti)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나(jhāna)와 ‘자-나 사마-빳띠(jhāna samāpatti)’와는 매우 다릅니다.
* 처음 두 가지는 닙바-나(Nibbānā)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나(Jhānā)는 ‘이 세상’에 속합니다. 자-나는 기본적으로 색계 범천과 무색계 범천이 즐기는(누리는) 심적 경향(mindset)입니다.
2.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아래 내용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닙바-나(특히, 아라한과, Arahanthood)의 개념 외에도 이 포스트에서 다루는 개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자세히 조사 연구하여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계속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며, 이 사람들에게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개념들은 보통 사람이 익숙한 개념과는 상반됩니다. 보통 사람은 물질 세계에 있는 것들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므로, 재탄생 과정(윤회)을 멈추려고 하는(아라한과를 얻으려고 하는) 그 이유가 합리화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러한 추상적 개념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아나-가-미(Anāgāmi, 아나함) 단계에 가까워질 때만 실로 뜻이 통하기 시작합니다.
* 같은 식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모든 생각이 멈춘 곳인)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가 어떻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필자가 [‘주요 담마 개념’ 섹션에 있는] ‘닙바-나’ 서브 섹션에서 ‘닙바-나의 행복은 즐거운 느낌(웨-다나 쩨-따시까를 포함하며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하는 느낌)이 아니다’라고 설명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열반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는 편두통이 사라질 때 느끼는 안도감에 더 가깝습니다.
* 그 점을 배제하고 논의를 시작해 봅시다.
3. 첫째, 생명은 찟따 위티(citta vithi)를 통해서가 아니라 업 에너지(kammic energy)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깜마자 까야(kammaja kaya)는 항상 있습니다. 깜마자(kammaja, ‘kamma’+‘ja’)는 ‘깜마(업)가 생성한’을 의미합니다.
* 깜마자 까야(kammaja kaya) 또는 간답바(gandhabba)는 쭈띠-빠띠산디(cuti-patisandhi, 죽음-재생연결) 순간에 생깁니다. 여기서 간답바(인간계와 동물계의 마노마야 까야)는 하다야 와투(hadaya vatthu)와 5가지 빠사다 루-빠(pasada rūpa)로 이루어집니다[간답바는 찟따자 까야와 우투자 까야를 포함함]. 우리 육체의 청사진은 깜마자 까야(kammaja kaya) 또는 간답바(gandhabba)에 있으며, 그래서 육체는 깜마자 까야(kammaja kaya) 또는 간답바(gandhabba)에 따라 자랍니다.
* ‘현재 바와(present bhava)’에서 깜마자 까야(kammaja kaya)의 업 에너지가 소진될 때, ‘다음 바와(next bhava)’에 부합하는 ‘새로운 깜마자 까야(new kammaja kaya)’가 쭈띠-빠띠산디(cuti-patisandhi, 죽음-재생연결) 순간에 ‘새로운 바와(new bhava)’를 위한 업 에너지에 의해 시작됩니다.
4. 그래서, 우리 각자는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부터 이 세상(31영역의 세상)에서 영역의 대부분[즉, 아나-가-미 성자가 태어나는 영역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 부합하는 깜마자 까야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 해당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는 ‘검색 상자’를 사용하여 관련 포스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깜마자(kammaja), 찟따자(cittaja), 우뚜자(utuja) 및 까라자 까야(karaja kaya)라는 네 가지 유형의 까야(kaya)가 있습니다. 마지막 것은 우리 육체입니다. 그런 육체는 기본적으로 단지 간답바만 있는 루-삐-와짜라(rūpāvacara, 색계)와 아루-빠-와짜라(arūpāvacara, 무색계) 영역에는 없습니다.
5. 찟따자 까야(cittaja kaya)는 찟따 위티(citta vithi, 인식과정)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찟따(citta)는 깜마자 까야(kammaja kaya)에 속하는 하다야 와뚜(hayada vatthu)에서 일어납니다.
* 찟따(citta)는 항상 패킷(packet), 즉 위티(vithi) 단위로 진행합니다. 각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 오문인식과정)는 항상 17개의 찟따를 가집니다.
* 마노-드와-라 찟따 위티(manōdvāra citta vithi, 의문인식과정)는 10~12개의 찟따를 가집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빳띠(samāpatti)에 있을 때, 마노-드와-라 찟따 위티에서는 찟따가 연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빳띠에 있을 때, 연속하여 흐르는 마노-드와-라 찟타의 수에는 정해진 상한이 없습니다.
* 마음은 마노-드와-라/빤짜드와-라 찟따 위티(manōdvāra/pancadvāra citta vithi) 사이에 다른 유형의 바왕가(bhavanga)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6. 깜마자 까야(kammaja kaya)는 언제나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에, 찟따자 까야(cittaja kaya)에는 갭(gap)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바왕가(bhavanga)는 때때로 찟따 위티(citta vithi) 안에 일어나는 바왕가 찟따(bhavanga citta) 외에 ‘마음 상태’입니다. '바와’와 ‘바왕가’ - 알기 쉽게 설명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바왕가(bhavanga) 상태에 있을 때는 찟따 위티(citta vithi)의 진행이 없으므로, ‘보편 쩨-따시까(universal cētasika)’도 없습니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거기에는 어떤 생각 대상(아-람마나, ārammana)도 없습니다.
* 그래서, 마음이 바왕가 상태에 있을 때, 아무런 찟따 위띠(citta vithi)의 진행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대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켜져 있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바왕가 상태 안에 찟따 위띠(citta vithi)의 진행이 없다는 것만을 의미합니다.
* 바왕가(bhavanga) 상태는 [채널이] 방송국에 맞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화면 상에 흰색 점들이 깜빡이는 것을 볼 수 있고, 윙윙거리는 배경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면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마음은 켜져 있지만, 생각 대상은 없습니다.
* 아-람마나(ārammana, 생각 대상)가 마음에 떠오르면, 마음은 그 소리, 광경, 냄새 등을 포착합니다. 그것은 마치 TV가 방송국에 그 채널이 맞추어져, 화면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7. 어떤 사마-빳띠(samāpatti)와 자-나(jhāna)의 주 차이점은 자-나 찟따(jhāna citta)는 연속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나(jhānā) 상태에 있을 때, 자-나 찟따 위티(jhāna citta vithi)는 그 사이에 들어오는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 오문인식과정)에 의해 중단됩니다.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는 다섯가지 육체적 감각을 통해 들어옵니다. 자-나(jhāna) 상태에 있을 때는 보고 듣고 등을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어떤 유형의 사마-빳띠(samāpatti)에 있을 때, 상응하는 마노-드와-라 찟따 위티(manōdvāra citta vithi)는 연속적으로 진행합니다. 그러므로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가 진행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사마-빳띠(samāpatti)에 있는 자는 외부 환경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8. 자-나 사마-빳띠(jhāna samāpatti)에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자-나 찟따 위티(jhāna citta vithi)의 흐름을 방해하는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 오문인식과정)는 없습니다. 자-나 사마-빳띠(jhāna samāpatti)에 들어 있는 자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등을 할 수 없습니다.
* 자-나(jhāna)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연습을 통해 자-나 사마-빳띠(jhānā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자-나(jhānā)를 기름에 따라, 잇따른 자-나 찟따 위티(jhānā citta vithi) 사이에 오는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가 점점 더 적어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2~3개의 자-나 찟따 위티(jhānā citta vithi)만 진행한 후,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가 들어오게 됩니다. 연습을 하면, 몇 시간 동안 연속적으로 자-나 찟따 위티(jhānā citta vithi)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9. 그러나, 아산냐-(asaññā, 무상유정) 영역에는 찟따자 까야(cittaja kaya) 또는 바왕가(bhavanga) 상태도 없습니다. 그 유정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업 에너지에 의해서 삶이 유지되는 미세한 물질적 몸(육체)이 있습니다. 그래서 깜마자 까야(kammaja kaya)는 거기에 있습니다.
* 붓다께서 아산냐-(asaññā) 명상 기술을 연마하여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태어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유정체는 아산냐-(asaññā) 영역에서 500 마하깔빠(500 mahā kalpa, 수조 년) 동안 살고 나면, 인간 영역으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 이전 포스트에서 필자는 윈냐-나(viññāna)는 루빡칸다(rupakkhandha)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루빡칸다(rupakkhandha)는 윈냐-나(viññāna) 없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어떤 이유로 무의식 상태에 빠지면, 그 시간 동안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바왕가(bhavanga) 상태도 없습니다. 거기 삶은 ‘지위띤드리야 쩨-따시까(jivitindriya cētasika)’가 아니라, 활성 루-빠 지위띤드리야(rūpa jivitindriya)를 통해 깜마자 까야(kammaja kaya)에 의해 유지됩니다.
10. 팔라 사마-빳띠(phala samāpatti)에 있을 때, 팔라 찟따(phala citta)가 끊임없이 진행합니다.
* 예를 들면, 소-따빤나 팔라 사마-빳띠(Sōtapanna phala samāpatti)에 있을 때, 끊임없이 진행하는 소-따빤나 팔라 찟따(Sōtapanna phala citta)가 있습니다. 아라한뜨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에 있을 때, 아라한뜨 팔라 찟따(Arahant phala citta)가 끊임없이 진행합니다.
* 막가 팔라(magga phala)가 있는 모든 자가 자동으로 팔라 사마-빳띠(phala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나(jhāna)와 마찬가지로, 최근 삶에서 자-나(jhāna)를 기른 적이 없었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11.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들어 있을 때, 거기에는 찟따 윗티(citta vithi) 또는 바왕가(bhavanga) 상태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 하지만, 물론 니로-다 사마-빳티(nirōdha samāpatti)와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모든 오염원(그래서 아윗자-)를 제거했지만,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있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산냐-(asaññā) 영역에 있는 자는 그곳의 삶이 끝나면, 인간 영역으로 돌아올 것이고, 나중의 탄생에서 아빠-야(apāya, 악처)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 이 점은 실제로 마음으로 나타나는 어떤 찟따도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평화로운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찟따가 없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 지에 대해 보통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설명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조차 어렵습니다. 자-나(jhāna)를 기르고 더 높은 선정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 사람들은 제8선정(네-와 산냐- 나- 산냐-, nēva saññā nā saññā)까지 자-나(jhāna)를 줄곧 기릅니다.
12.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는 마하-웨달라 숫따(Mahāvedalla Sutta ,MN 43)의 구절에서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죽은 몸과 ‘니로-다 사마-빳띠’에 들어 있는 몸 사이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와-양, 아-우소, 마또 깔-란까또 땃사 까-야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와찌-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찟따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아-유 빠릭키-노, 우스마- 우-빠산따-, 인드리야-니 빠리빈나-니. 요 짜-양 빅쿠 산냐-웨다이따니로당 사마-빤노 땃사삐 까-야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와찌-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찟따상카-라- 니룻다- 빠띱빳삿다-, 아-유 나 빠릭키-노, 우스마- 아우-빠산따-, 인드리야-니 윕빠산나-니. 이와-양, 아-우소, 마또 깔-란까또, 요 짜양 빅쿠 산냐-웨다이따니로당 사마-빤노 - 이당 네상 나-나-까라난”띠.(Yvāyaṃ, āvuso, mato kālaṅkato tassa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parikkhīṇo, usmā vūpasantā, indriyāni paribhinnāni.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tassapi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na parikkhīṇ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Yvāyaṃ, āvuso, mato kālaṅkato,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idaṃ nesaṃ nānākaraṇan”ti.)”
번역: “아-우소여, 죽은 몸은 어떤 까-야상카-라와 와찌-상카-라와 찟따상카-라도 일으키지 않으며, 그 수명이 다했고 숨쉬지 않으며, 몸은 모든 감각기관이 죽은 상태로 몸이 차가워진다. 그러나 산냐-웨다이따-니로-다 사마-빳띠(saññāvedayita-nirōdha samāpatti)에 있는 그 빅쿠는 까-야상카-라와 와찌-상카-라와 찟따상카-라가 모두 그치고 숨쉬지 않지만, 그 몸은 차가워지지 않고 모든 감각기관은 살아 있다. 아-우소여, 이것이 죽은 몸과 ‘니로-다 사마-빳띠’에 들어 있는 그 빅쿠 사이의 차이다.”
* ‘산냐-웨다이따 - 니로-다 사마-빳띠 (saññāvedayita-nirōdha samāpatti)’에 있을 때는 모든 상카-라가 멈추어지기 때문에, ‘보편 쩨-따시까(universal cētasika)’가 있는 찟따(citta)도 없습니다.
* 이것은 또한 ‘산냐-웨다이따(saññāvedayita)’가 어떤 산냐-(saññā)나 웨다나(vedana)도 없다는 뜻임을 명확히 합니다.
13. 모든 아라한(Arahant)들이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대한 접근은 닙바-나(Nibbāna)를 생각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8번째 자-나(jhāna)를 통해 이행됩니다. 더 높은 자-나(jhānā)에 도달하게 되면서, 찟따(citta)의 쩨-따시카(cētasika) 수가 더 적어지며, 찟따(citta)는 점점 더 부담이 적어집니다.
* 아라한(Arahant)은 모든 자-나(jhāna)를 기르고, 8번째 자-나(nēva saññā nā saññā, 네-와 산냐- 나- 산냐-)에 도달해야 합니다. 네-와 산냐- 나- 산냐- (nēva saññā nā saññā) 상태는 찟따 위티(citta vithi)의 발생을 막는 것에 완전히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 그 상태에서, 아라한(Arahant)은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지 결정할 수 있으며, 네-와 산냐- 나- 산냐- (nēva saññā nā saññā) 상태에서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로 이행합니다.
* 아나리야 요-기(anāriya yōgi, 세간 수행자)가 네-와 산냐- 나- 산냐- (nēva saññā nā saññā) 상태에 도달할 수 있지만, ‘산냐-웨다이따 니로-다 사마-빳띠(saññāvedayita nirōdha samāpatti)’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8가지 자-나(jhāna)를 기른 아나-가미(Anāgami) 성자가 ‘산냐-웨다이따 니로-다 사마-빳띠(saññāvedayita nirōdha samāpatti)’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명확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 그런데,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도달하는 이 과정은 ‘Anupada Sutta (MN 111)’와 ‘Pañcakaṅga Sutta (SN 36.19)’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14. ‘Pañcakaṅga Sutta (SN 36.19)’에서는 다른 중요한 점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산냐-웨다이따 니로-다 사마-빳띠(saññāvedayita nirōdha samāpatti)’에 들어 있을 때, 산냐-(saññā) 또는 웨다나(vedana)로 함께 진행하는 찟따(citta)가 없다면, 그것이 궁극적 행복(닙바나의 행복)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 닙바나의 행복은 이 세상에 속하는 쩨따시까 웨다나(cetasika vedana, 느낌 요소)의 행복이 아닙니다. 필자는 그것은 장기간 겪던 편두통이 마침내 사라질 때 느끼는 안도감에 비유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요 담마 개념’ 섹션에 있는] ‘닙바나’ 서브 섹션을 보세요.
위 숫따(sutta)는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타-낭 코 빠네땅, 아-난다, 윗자디 양 안냐띳티야- 빠립바-자까- 에왕 와데이융: ‘산냐-웨다이따니로당 사마노 고따모 아-하, 딴짜 수카스밍 빤냐뻬띠. 따이당 낑수, 따이당 까탕수-’띠?(Ṭhānaṃ kho panetaṃ, āna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aṇo gotamo āha, tañca sukhasmiṃ paññapeti. Tayidaṃ kiṃsu, tayidaṃ kathaṃsū’ti?)”
“에왕와-디노, 아-난다, 안냐띳티야- 빠립바-자까- 에와맛수 와짜니-야: ‘나 코, 아-우소, 바가와- 수칸네와 웨다낭 산다-야 수카스밍 빤냐뻬띠. 얏타 얏타, 아-우소, 수캉 우빨랍바띠, 야힝 야힝 땅 땅 따타-가또 수카스밍 빤냐뻬띠-’띠(Evaṃvādino, āna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na kho, āvuso, bhagavā sukhaññeva vedanaṃ sandhāya sukhasmiṃ paññapeti. Yattha yattha, āvuso, sukhaṃ upalabbhati, yahiṃ yahiṃ taṃ taṃ tathāgato sukhasmiṃ paññapetī’ti.)”
번역: “아난다여, 다른 파의 유행자들이 이와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은둔자 고따마는 산냐-웨다이따 니로-다(saññāvedayita nirōdha)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즐거움(행복)이라고 합니다. 이 즐거움(행복)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즐거움(행복)입니까?’ ”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말해야 한다: ‘축복받은 자(바가와-)는 즐거운(행복한) 느낌뿐만이 아니라 즐거움(행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따타가따(Tathagata, 여래)는 그것이 얻어질 때는 언제든 어디서든 즐거움(행복)이라고 하십니다.’ ”
15.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서는 찟따 위티(citta vithi, 인식과정)가 진행되지 않고, 바왕가(bhavanga) 상태도 없습니다. 몸의 생명은 업 에너지로 유지됩니다. 웨다나(vedana), 산냐(saññā) 등이 없습니다.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있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7일입니다. 아라한(Arahant)은 니로-다 사마-빳띠에 들어가기 전에 그 상태에 얼마나 오래(최대 7일) 머무를 지에 대해 결의할 수 있습니다.
*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상태는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와 꼭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에 들어가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아라한(Arahant)은 ‘닙바나의 행복’을 누리고 ‘짐이 되는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능할 때마다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필자가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16.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와는 다른 유형의 사마-빳띠(samāpatti)에서는 마노-드와-라 찟따 위티(manōdvāra citta vithi)가 계속 진행합니다. 바왕가(bhavanga) 상태에 떨어지지도 않고, 빤짜드와-라 찟따 위티(pancadvāra citta vithi)로 외부 대상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 자는 보거나 듣는 등[의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마-빳띠(samāpatti)는 결국 저절로 끊어지거나, 그것에 숙달되면 사마-빳띠(samāpatti)에 머무르는 시간을 미리 정할 수 있습니다.
* 아라한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는 아라한(Arahant)이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 즉 ‘보편 쩨-따시까(universal cētasika)’만 있고 그 산냐 쩨-따시까(saññā cētasika)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찟따’를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닙바-나(Nibbānā)는 팟사 쩨-따시까(phassa cētasika)로 접촉한 생각 대상이며, 웨-다나(vēdana)와 산냐(saññā)는 그것에 기반합니다(우리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거기서도 자-나 사마-빳띠(jhānā samāpatti)에 들어 있을 때와 같이, 듣거나 보는 등 어떤 것도 하지 못합니다.
* 아라한(Arahant)이 니로-다 사마-빳띠(nirōdha samāpatti) 또는 아라한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 상태에 들어 있지 않을 때, 그 아라한 성자의 찟따(citta)는 보통 사람이 ‘윈냐-나칸다(viññānkkhandha)’까지 이르러 끝나는 그 [오염 9단계]과정 중에서 마노(manō) 상태에만 이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Pabhassara Citta, Radiant Mind, and Bhavanga’ 포스트의 4번을 참조하세요.
17. 그것(위 참조 포스트)이 ‘Nirōdha Samāpatti’, ‘Difference between “Arahant phala samāpatti" and “Nirōdha samāpatti” ?’, 및 ‘Nirōdha Samāpatti and Amoha’ 토픽(의제)으로 토론 포럼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질문이 더 있으면, ‘Difference between “Arahant phala samāpatti” and “Nirōdha samāpatti”?’ 토픽(의제) 아래에서 질문해 주세요. 필자는 너무 많은 ‘중복되고 관련된 토픽(의제)’으로 논의를 하지 않기 위해 다른 2개의 토픽(의제)을 닫을 것입니다.
* 위[토론 포럼]에서 기술할 때에는 띠삐따까(Tipitaka, 삼장)로부터 출처도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필자가 와하라까 테-로(Waharaka Thēro)의 데-사나(dēsana 법문)를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띠삐따까(Tipitaka, 빠알리 삼장)에서 그 내용을 발견하는 대로 출처도 추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