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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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닛데사(간략한 설명)

 

원문: Elephants in the Room 섹션의 ‘Niddesa (Brief Description) of Paṭicca Samuppāda’ 포스트

- 2022년 3월 7일 작성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대한 닛데사(간략한 설명) 버전은 웃데-사(발화 발언) 버전보다 좀 더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이 포스트에서 우리는 닛데사 버전을 논의합니다.

 

세 마리의 ‘방 안의 코끼리’

 

1. 약 2000년 전에 (산스크리트 문학과 함께)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가 출현하면서,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와 같은 핵심어(키워드)의 의미가 왜곡되었습니다.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호흡 명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은 약 1500년 전에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에 통합(반영/추가)되었습니다.

 

  • * 붓다 담마(불교)는 1800년대부터 시작된 일부 영국 공무원들과 유럽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300~400년 정도의 또 다른 하나의 최근 암흑기를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 발명된 인쇄기를 사용하여 (의도치 않게) 그 초기의 왜곡을 영구화시켰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빠알리 띠삐따까(Pāli Tipiṭaka)를 낱말 그대로 대응시켜 영어로 번역하는 관행을 시작했습니다.

  • * 마하-야-나(Mahāyāna)의 영향으로 인해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와 같은 핵심어(키워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채택하는 것은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됩니다.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호흡 명상’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필자는 과거에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이 일련의 포스트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 * 그 전에, 띠삐따까(Tipiṭaka)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한 결과로 발생한 더 시급한 세 번째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의 대부분은 빠알리어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는 어린 아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필자는 첫 번째 ‘방 안의 코끼리’라고 부르겠습니다. 띠삐따까(Tipiṭaka)를 낱말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여, 내재된 깊은 개념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 ‘방 안의 코끼리’

 

2. 다음 구절(웃데사 형태)은 두띠야보디 숫따(‘Dutiyabodhi Sutta, Ud 1.2’)에서 따온 것입니다. 해당 구절의 빠알리 버전은 참고 자료 1에 있습니다.

 

“[깨달음의] 밤의 둘째 부분에서 붓다께서는 의존적 발생(dependent origination)에 대해 역(그침)방향으로 숙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그침으로 인해 저것이 그친다. 그것은 바로, 무지(ignorance)가 그치면,  선택(choices)이 그친다. 선택이 그치면, 의식(consciousness)이 그친다. 의식이 그치면, 이름과 형태(name and form)가 그친다. 이름과 형태가 그치면, 6가지 감각 영역(six sense fields)이 그친다. 6가지 감각 영역이 그치면, 접촉(contact)이 그친다. 접촉이 그치면, 느낌(feeling)이 그친다. 느낌이 그치면, 갈망(desire)이 그친다. 갈망이 그치면, 움켜잡음(grasping)이 그친다. 움켜잡음이 그치면, 지속 존재(continued existence)가 그친다. 지속 존재가 그치면,  재탄생(rebirth)이 그친다. 재탄생이 그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참함, 절망이 그친다. 그것이 이 모든 괴로움/고통의 덩어리가 그치는 방법/방식이다.”

 

  • *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의 두 번째 번역은 거의 동일합니다. ‘The Second Discourse about the Awakening Tree’을 참조하세요.

  • * 그런 번역은 그 명백한 잘못됨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은 채, 많은 해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토론 포럼의 정신나간 토론 

 

3. 담마 휘일(Dhamma Wheel)에서 최근 진행 중인 ‘Do Arhats experience contact with their sixfold sense media? What about vedanā?’라는 토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번역으로 인한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참가자들은 위 #2 숫따에 있는 것과 같은 번역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 * #2의 번역은 무지(avijjā, 아윗자-)가 없을 때 선택(saṅkhāra, 상카-라), 의식(viññāṇa, 윈냐-나), 그리고 나머지 실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 우리 모두는 붓다와 아라한에게는 아윗자-(avijjā)(사성제에 대한 무지)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데 동의합니다.

  • * 그러면, 위 #2의 번역에 따르면, 그들은 더 이상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고 의식(viññāṇa, 윈냐-나)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위 링크의 토론 포럼에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 * 반면에, 우리는 붓다께서 깨달음 이후에 45년을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모든 여섯 가지 감각 기능을 경험하시고, 그것들을 최적으로 사용하시며, 최고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원하시는 만큼 과거의 어떤 것도 기억해 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또한 육체적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를 포함하여 모든 유형의 웨다나-(vedanā)를 느꼈습니다(붓다께서는 허리 문제가 있었고, 데와닷따에 의해 부상을 당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4.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숫따(sutta)가 잘못된 것일까요?

 

  • * 숫따(sutta)는 완전히 괜찮습니다. 그런 문제는 번역자가 붓다 담마의 기본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또는 이해하지 않고) 빠알리 숫따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기 시작할 때 발생합니다.

  • *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많은 숫따(sutta)는 고도로 축약된 웃데사(uddēsa, 발화 발언)이라는 것입니다. ‘숫따 해석 ㅡ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3가지 수준의 설명이 있습니다.

  • * 닛데-사(niddēsa) 형식은 약간 확장된 버전입니다. 그 다음, 빠띠닛데-사(paṭiniddēsa) 형식은 예와 함께 세부 사항을 제공합니다. 누군가가 웃데사(uddesa) 버전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려고 하면,  위 #2 및 #3에서 보았듯이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 * 많은 핵심어(키워드)는 맥락에 따라 다른 용도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윈냐-나(viññāṇa)는 많은 유형(예로서, 위빠-까 윈냐-나와 깜마 윈냐-나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유형임)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대해 ‘의식(consciousness)’으로 번역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숫따(sutta)가 어떤 유형의 윈냐-나(viññāṇa)를 논의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번역들을 읽으면서 빠띳짜 사뭅빠-다를 배울 수 있겠는가?

 

5. ‘32 results for avijjā AND nirodhā AND saṅkhāranirodho’ 검색 결과가 있는데, 이것은 참고 자료 1에 대해 부정확한 [번역으로 된]  구절을 가진 [영어 번역] 숫따가 최소한 32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목록에 있는 많은 숫따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논의하는 Saṁyutta Nikāya 12(상윳따 니까-야 12)에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사람들이 그 영어 번역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배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 이 모든 경우에 빠띨로마(Paṭiloma, 역방향/그침방향) 빠띳자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표준 구절인 “avijjā nirodhā saṅkhāra nirodho, saṅkhāra nirodhā viññāṇa nirodho..”는 영어로 “무지가 그치면, 선택이 그친다. 선택이 그치면, 의식이 그친다..”로 번역됩니다. 

  • * 부처님은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자마자 의식을 잃으셨습니까? 아라한은 아라한과에 도달할 때 의식을 잃습니까? 그 반면에, 우리는 붓다께서 깨달음 이후에 45년을 사셨고, 많은 아라한들이 아라한과에 도달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담마를 가르치며 오랫동안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필자가 본 모든 영어 번역은 정확히 직역이며,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한 것입니다.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것의 문제는 훨씬 더 깊다

 

6. 물론,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아눌로마(Anuloma, 순방향/생성방향)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조차도 그런 낱말별 번역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 참고 자료 2의 숫따(및 #5에 있는 목록의 모든 숫따)에는 “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ṁ..”가 명시되어 있으며, 그들은 “무지를 조건으로 선택이 있다(일어난다). 선택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일어난다)…”로 번역합니다.

  • * 상카-라(saṅkhāra)에는 많은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아윗자-(무지)로 인해 발생하지만, 아윗자-(무지)가 없는 아라한은 다른 유형의 상카-라를 생성합니다.

 

‘선택’과 ‘의도적 형성’은 무엇인가?

 

7. 또 다른 문제는 상카-라(saṅkhāra)를 ‘선택’과 ‘의도적 형성’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낱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Explaining sankhāra= “choices” ’에서 그 질문이 나왔고 ‘답 없음’이었습니다. 해결없이 끝난 또 다른 토론을 ‘The way I analyzed Saṅkhāra’에서 볼 수 있습니다.

 

  • *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웨다나- 및 산냐-로 정의됨)는 모든 감각적 사건과 함께 발생합니다. 따라서 모든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는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를 가질 것입니다.

  • * 그러나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에서 상카-라(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우리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기초로 생각, 말, 행동으로 깜마(kamma, 업)를 축적합니다. 그것이 닛데사(niddesa) 설명이다. 따라서,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로 인해 일어납니다.

  • * 앞서 많은 포스트에서 빠띠닛데-사(paṭiniddēsa) 버전으로 위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여기서 다음 포스트에서 그것들을 다시 다루겠습니다.

  • * 아라한에게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만이 일어남을 멈춥니다. 아라한들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를 경험합니다.

 

8. 달리 말하면, 누구나(붓다 담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어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전을 옆에 두고 낱말별로 번역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완전한 혼란을 초래합니다.

 

  • * 많은 표준 사전들은 Rhys Davids와 같은 초기 유럽 학자들이 편찬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현지인들로부터 빠알리어(및 산스크리트어)를 배운 다음 띠삐따까(Tipiṭaka)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했습니다!

  • *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학 교과서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말이 될까요?

 

닛데사 버전의 설명

 

9. 빠띨로마 빠띳짜 사뭅빠다(Paṭiloma Paṭicca Samuppāda)(위 #2의 숫따)의 단계는 ‘웃데-사(uddēsa, 발화 발언)’ 형식입니다. 그것은 11단계를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 단계들은 닛데-사(niddēsa, 간략한 설명) 또는 빠띠닛데-사(paṭiniddēsa, 상세한 설명)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 * 다음 수준의 설명인 아래 닛데사(niddēsa) 버전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명확하게 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버전은 더 구체적인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 윈냐-나(viññāṇa) 등을 사용합니다.

 

10. 닛데-사(niddēsa) 버전에서 단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윗자-(avijjā)가 그치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그치고,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그치면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가 그치고,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가 그치면 나마-루-빠(nāmarūpa)가 그치고, 나마-루-빠(nāmarūpa)가 그치면 살라-야따나(saḷāyatana)가 그치고, 살라-야따나(saḷāyatana)가 그치면 삼팟사(samphassa)가 그치고, 삼팟사(samphassa)가 그치면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가 그치고,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가 그치면 땅하-(taṇhā)가 그치고, 땅하-(taṇhā)가 그치면 우빠-다-나(upādāna)가 그치고, 우빠-다-나(upādāna)가 그치면 바와(bhava)가 그치고, 바와(bhava)가 그치면 자-띠(jāti)가 그치고, 자-띠(jāti)가 그치면 자라- 마라낭 소까 빠리데와 둑카 도마낫수빠-야-사-(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가 그친다. 그것이 고통의 전체 덩어리의 끝이다.”

 

  • * 우리는 위 #3의 Dhamma Wheel 포럼에서 논의된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명확함을 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 * 밑줄과 굵은 글씨로 표시된 모든 항목은 아라한(Arahant)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예를 들어,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여섯 감각을 통한 보통 의식)와, 그런 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보통의 느낌(웨다나)은 경험합니다.

  • * 물론, 자-띠(jāti)는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Uppatti Paṭicca Samuppāda)에서 미래의 태어남을 가리킵니다. 모든 태어남(태어나서 아라한이 된 것을 포함)은 늙음, 쇠퇴, 고통, 그리고 결국 죽음을 겪습니다. 따라서 아라한조차도 육체가 죽을 때까지 그것들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후(아라한의 육체의 죽음 후)에는 더 이상 태어남도 없고 고통도 더 이상 없습니다!

 

11. 위 #10에서 핵심 빠알리 낱말을 (영어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에 상응하는 (영어) 낱말이 없습니다!

 

  • * 붓다나 아라한에게 일어남이 그치는 것은 오직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입니다. 보통의 의식(위빠-까 윈냐-나, vipāka viññāṇa)은 그 죽음(빠리닙바-나)까지 일어날 것입니다.

  • * 물론, 독자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비상카-라는 깜마 윈냐-나로 이어진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다른 사람들은 왜 방 안의 코끼리를 보지 못하는가?

 

12. 그런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알아 채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 불교로 눈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은 불일치(모순)를 찾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특정 개념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에는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되는 어떤 ‘신비적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 * 또 다른 하나는 불교에 관한 ‘책’을 쓴 빅쿠들/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높은 존경심입니다. 빅쿠들을 공경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범적인 측면이지만, 붓다께서는 의심스러운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캐묻지 않고는 붓다 자신의 말조차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권 사람들이 ‘코끼리를 보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카-라(saṅkhāra)와 윈냐-나(viññāṇa)와 같은 낱말은 ‘형성’과 ‘의식’으로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이 시리즈에서 이러한 기본 개념을 명확히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먼저 문제가 있다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 * 토론 포럼의 최근 댓글을 통해 필자는 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아무리 명백한 오류를 지적해도, 그들은 “아, 저는 그냥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필자가 “사람 X는 2 더하기 3은 6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닌가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완전히 다른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의 개념을 쉬운 말로

 

13.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기본 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 * 다음 포스트에서는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대로 개념을 파악해야 합니다. 낱말/구절을 암기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참고 자료

 

1. 두띠야보디 숫따( ‘Dutiyabodhi Sutta (Ud 1.2)’ )에서 관련된 구절: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majjhimaṁ yāmaṁ paṭiccasamuppādaṁ paṭilomaṁ sādhukaṁ manasākāsi:

Iti imasmiṁ a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 yadidaṁ—avijjā 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 nirodhā viññāṇa nirodho, viññāṇa nirodhā nāmarūpa nirodho, nāmarūpa nirodhā saḷāyatana nirodho, saḷāyatana nirodhā phassa nirodho, phassa nirodhā vedanā nirodho, vedanā nirodhā taṇhā nirodho, taṇhā nirodhā upādāna nirodho, upādāna nirodhā bhava nirodho, bhava nirodhā jāti nirodho, jāti nirodh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2. 빠타마보디 숫따( ‘Paṭhamabodhi Sutta (Ud 1.1)’ )에서 관련된 구절: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paṭhamaṁ yāmaṁ paṭiccasamuppādaṁ anulomaṁ sādhukaṁ manasākāsi:

Iti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ṁ uppajjati, yadidaṁ—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 paccayā nāmarūpaṁ, nāmarūpa paccayā saḷāyatanaṁ, saḷāyatana paccayā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vedanā paccayā taṇhā, taṇhā paccayā upādānaṁ, upādāna paccayā bhavo, bhava paccayā jāti, jāti 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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