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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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쩨-따나-까라니-야 숫따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Na Cētanākaranīya Sutta’ 포스트

- 2018년 5월 21일 작성; 2018년 5월 23일 개정; 2021년 11월 19일 개정; 2022년 7월 23일 개정

 

1. ‘나 쩨-따나-까라니-야 숫따(Na Cētanākaranīya Sutta)’가 숫따(경)의 올바른 명칭이며,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 웹사이트를 포함한 여러 웹사이트에 있는 ‘쩨-따나-까라니야 숫따’(Cetanākaraṇīya Sutta (AN 11.2) 참조)가 아닙니다. 따라서, 거기에 있는 영어 번역의 제목인 ‘Making a Wish’은 잘못되었습니다.

 

  • * 쩨따나(cetana)는 사람이 의도하거나 바라는 것입니다. 까라니야(karaniya)는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na)’는 ‘아님(부정)’을 의미합니다. 그 숫따(sutta)가 가르치는 것은 ‘단지(그냥) 그러 그러한 것을 바라는 것으로는 닙바-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 [숫따(경)의] 올바른 제목은 빠알리/싱할라 붓다 자얀띠 띠삐따까 시리즈(Pāli/Sinhala Buddha Jayanthi Tipiṭaka Series) XXIII,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āya)(제6부, p.586)에 있습니다.

  • * 그러므로, 숫따(sutta, 경)의 영문 제목은 ‘Making a Wish Will Not Work’와 같아야 합니다.

 

2. 숫따(sutta, 경)는 꽤 짧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숫따(sutta, 경)를 모두 번역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문을 빠알리 원문과 나란히 배치하여, 빠알리 원문이 어떻게 번역되는지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것에서 해방되기를, 저것이 되기를” 등을 암송/낭송하거나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 * 미래의 괴로움/고통을 멈추고 그 길을 따르기 위해 해야할 것을 계획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암송/낭송, 사마타 명상)이 전체 과정의 일부여야 하지만, 조용한 곳에 앉아 단지 암송/낭송하거나 심지어 [사마타] 명상하는 것과 같은 쉬운 해결책은 없습니다.

  • * 이 단계적 과정은 숫따(sutta, 경)에 명확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 * 필자는 이어지는 각 다른 구절을 교대로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역문과 빠알리 원문의 구절을 서로 맞추기가 쉬울 것입니다.

 

“도덕적 행위(실라, sila)를 하고, 따라서 도덕적이고 덕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침착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마음의 동요/흥분(들뜸)은 도덕적인 행위(실라, sila)를 하고 덕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요된/흥분된 마음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내 안에 행복이 일어나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행복(평온함)은 동요된/흥분된(들뜬) 마음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일어난다.

 

행복(마음의 평온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내 안에 일어나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기쁨은 평화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나의 몸이 가벼워지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몸의 가벼움(빳삿디, passaddhi)을 얻는다.

 

몸의 가벼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수카(sukha)를 경험하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몸의 가벼움이 있는 사람은 수카(sukha)를 경험한다.

 

수카(sukha)를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내 마음이 사마-디(samādhi)에 도달하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수카(sukha)를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사마-디(samādhi)에 도달한다.

 

사마-디(samādhi)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내가 이 세상의 참된 본성(야타-부-따 냐-나, 틸락카나에 대한 이해)을 알고 보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사마-디(samādhi)에 도달한 사람은 이 세상의 참된 본성을 본다. (여기서 사람은 ‘성자_Ariya’로부터 ‘띨락카나_Tilakkhana’를 배운 것으로 가정함. 아래 #3, #4를 참조.)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na)가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유혹에 끌리지 않기를(위라-가, virāga)”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세상것을 그대로 알고 보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세상것에 끌리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이 세상것에 끌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세상것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기를”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세상것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여 끌리지 않는 사람은 갈망에서 벗어난다.

 

갈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내가 모든 괴로움(고통)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는 앎을 깨닫기를(위뭇띠냐-나 닷사나, vimuttiñāṇa dassana)”하고 바랄(쩨따나-, cetanā) 필요가 없다. 갈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괴로움(고통)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난다.

 

빅쿠들이여, 이와 같이, 갈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보상으로서 모든 괴로움(고통)에서 벗어나고,  끌리지 않음은 그 보상으로서 갈망 없음을 가지고, 야타-부-타 냐-나(yathābhūta ñāna)는 그 보상으로서 끌리지 않음을 가지고, 사마-디(samādhi)는 그 보상으로서  야타-부-타 냐-나(yathābhūta ñāna)를 가지고, 수카(sukha)는 그 보상으로서 사마-디(samādhi)를 가지고, 몸의 가벼움(빳삿디, passaddhi)은 그 보상으로서 수카(sukha)를 가지고, 기쁨이 충만함은 그 보상으로서 몸의 가벼움을 가지고, 평온한 마음은 그 보상으로서 기쁨을 가지고, 동요된/흥분된 마음에서 벗어남은 그 보상으로서 평온함을 가지고, 도덕적 행위는 그 보상으로서 마음의 동요/흥분(들뜸)이 일어나지 않는다.

빅쿠들이여, 이와 같이, 길러지고 충족된 담마의 자질은 성스런 길(성스런 팔정도)에서 더 많은 담마의 자질로 이어져, 이 해안에서 먼 해안(닙바-나, Nibbāna)에 도달한다.” 

“Sīlavato, bhikkhave, sīlasampannassa na cetanāya karaṇīyaṃ: ‘avippaṭisāro me uppajjat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sīlavato sīlasampannassa avippaṭisāro uppajjāti.

 

Avippaṭisāri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pāmojjaṃ me uppajjat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avippaṭisārissa pāmojjaṃ uppajjāti.

 

Pamudit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pīti me uppajjat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pamuditassa pīti uppajjāti.

 

Pītiman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kāyo me passambhat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sukhaṃ vediyām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passaddhakāyo sukhaṃ vediyati.

 

Sukhino,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cittaṃ me samādhiyat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yathābhūtaṃ jānāmi passām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samāhito yathābhūtaṃ jānāti passati.

 

Yathābhūtaṃ, bhikkhave, jānato passato na cetanāya karaṇīyaṃ: ‘nibbindām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yathābhūtaṃ jānaṃ passaṃ nibbindati.

 

Nibbinn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virajjām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nibbinno virajjāti.

 

Virattassa, bhikkhave, na cetanāya karaṇīyaṃ: ‘vimuttiñāṇadassanaṃ sacchikaromī’ti. Dhammatā esā, bhikkhave, yaṃ viratto vimuttiñāṇadassanaṃ sacchikaroti.

 

Iti kho, bhikkhave, virāgo vimuttiñāṇadassanattho vimuttiñāṇadassanānisaṃso, nibbidā virāgatthā virāgānisaṃsā, yathābhūtañāṇadassanaṃ nibbidatthaṃ nibbidānisaṃsaṃ, samādhi yathābhūtañāṇadassanattho yathābhūtañāṇadassanānisaṃso, sukhaṃ samādhatthaṃ samādhānisaṃsaṃ, passaddhi sukhatthā sukhānisaṃsā, pīti passaddhatthā passaddhānisaṃsā, pāmojjaṃ pītatthaṃ pītānisaṃsaṃ, avippaṭisāro pāmojjattho pāmojjānisaṃso, kusalāni sīlāni avippaṭisāratthāni avippaṭisārānisaṃsāni. 

Iti kho, bhikkhave, dhammā dhamme abhisandenti, dhammā dhamme paripūrenti apārā pāraṃ gamanāyā”ti.

 

3. 닙바-나에 이르는 길은 직선적인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직선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보다 오히려, 주어진 사람이 아라한 팔라(Arahant phala, 아라한과)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단계를 계속해서 반복 순환합니다.

 

  • * 평범한(세간) 실라(sila)로 시작하여, 띨락카나(Tilakkhana)에 대해 듣지 않고 사마-디(samādhi)의 초기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띨락카나(Tilakkhana)를 이해할 때까지는 흔들리는 기반 위에 있는 실라(sila)만으로는 그것을 넘어 진전할 수 없습니다.

  • * 일단 띨락카나(Tilakkhana)를 이해하기 시작하면(그리고 소-따빤나/소-따빤나 아누가-미가 되면), 그 사람의 실라(도덕적 행위)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리야깐-따 실라(Ariyakānta sila)라고 합니다.

  • * 그것이 성스런 팔정도에 들어가는 때입니다.

 

4. 다른 말로 하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평범한 길에서 시작하여, 띨락카나(Tilakkha)에 대한 이해로 성스런 길로 전환합니다. ‘붓다 담마에서 독특한 것은 무엇인가?’를 참조하세요.

 

  • *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 또는 빳쩨까 붓다(pacceka Buddha)만이 스스로 띨락카나(Tilakkhana)를 알아낼(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아리야(Ariya, 성자)로부터 띨락카나(Tilakkhana)를 배워야 합니다.

 

5.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자-나-(jhānā, 선정들)를 획득할 필요성의 언급이 [숫따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나(jhāna)는 특별한 종류의 사마-디(samādhi)입니다. 자-나-(jhānā, 선정들)을 기르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은 막가 팔라(magga phala, 도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수한 유형의 사마-디(samādhi)가 있습니다. 사람은 띨락카나(Tilakkhana)에 대한 이해로 (닙바-나를 얻는데 도움이 되는) 아리야 사마-디(Ariya samādhi)에 도달합니다.

 

6. 키워드(핵심 낱말):

 

  • * 아윕빠띠사-라(Avippatisāra)(싱할라어로 විපිලිසර බව): 사람의 마음은 보통 동요합니다(들뜹니다). 마음은 어디든 가려고 하는(날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마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도덕적인 행위를 유지하는데 집중하고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를 멀리할 때, 이 마음의 동요(들뜸/날뜀)가 점차로 줄어들고 주어진 개념에 더 오래 집중할 수 있습니다.

  • * 빠-못자(pāmojja)(싱할라어로 සතුට 또는 ප්රමෝදය): 마음의 행복(Happiness) 또는 평온함(tranquility)이 가장 가까운 번역어입니다. 이것은 ‘즐거운 마음 상태’ 아래, 즉 삐-띠(pīti)(싱할라어로 ප්රීති) 아래에 있습니다.

  • * 빳삼바띠(passambhati)/빳삿다(passaddha): 육체의 진정(가벼움)(කායික සැහැල්ලුව).

  • * 닙빈다띠(nibbindati): ~에 싫증나다, ~에 불만족스러워지다(කලකිරීම).

  • * 위랏자-띠(virajjāti)(‘위라-가_virāga’와 관련됨): 갈망 없음.

  • * 위뭇띠(vimutti): 괴로움/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다. 궁극적인(최종적) 벗어남(විමුක්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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