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google":["PT Serif","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Nanum Barun Gothic"]}

 

'무상함이 아닛짜의 잘못된 번역'이라는 논리적 증명

 

원문: Comments/Reviews 섹션의 ‘Logical Proof that Impermanence is Incorrect Translation of Anicca’ 포스트

 

이 포스트는 Mr. Alexander Ausweger의 코멘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닛짜, 둑카, 아낫따 – 잘못된 해석’ 포스트를 조금 수정하여 더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 특히 수학 논리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1. 수학적 논리를 사용하여,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무상(impermanence), 고(suffering), 무아(no-self)로 번역하는 것의 결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고급 수학적 개념은 필요하지 않지만, 다음 위키피디아(Wikipedia) 기사에 설명된 기본 논리 구조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autology_(logic)

 

2. ‘아닛짜, 둑카, 아낫따 – 잘못된 해석’ 포스트에서 설명햇듯이,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āya)의 아잣따닛짜 숫따(Ajjhattanicca Sutta)에서 붓다께서는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yadaniccam tan dukkham, tan dukkham tadanatta

즉, (아닛짜 → 둑카) 및 (둑카 → 아낫따)

 

여기에는, 두 가지 논리적 진술이 있는데, (아닛짜, 둑카, 아낫따’를 무상, 고, 무아로 각각 번역되어 잘못 번역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무상 → 고) 및 (고 → 무아)

 

  • * 이 광대한 우주에는 무한한 물질적인 것이 있으며 모든 것은 무상(impermanence)합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누군가에게 고통/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괴로움은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 닛짜 산냐(nicca sanna)로 기꺼이 그것들에 들러붙는 것에 의해서만 야기됩니다.

 

3. 먼저 (무상 → 고) 부분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우의 법칙(law of contraposition)을 사용하면,

(A \to B) \Leftrightarrow (\lnot B \to \lnot A) (‘A가 B를 내포한다면, not-B는 not-A를 의미한다’)이므로,

고통 없음(no suffering) → 영구함(permanence), 즉, 고통이 없으면 그것은 어떤 것(문제의 대상)이 영구적임을 의미한다’를 얻습니다.

 

  • * 그러나 ‘고통이 없다’는 것이 영구함을 의미하지 않는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이벌(경쟁 상대)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고통은 없습니다.

  • * 또 다른 예에서,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고통 없음(no-suffering)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두 예에서, ‘고통 없음(no-suffering)’ 상태는 ‘영구함(permanence)’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래의 진술(무상 → 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4. 이제 또 다른 분석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진술 ‘A → B’는 ‘¬A → ¬B’로 이어지지 않습니다(즉, ‘not A → not B’가 자동적으로 뒤따르지는 않음).

 

그러나, B가 A에만 종속되고 다른 요인이 없다면, 진술 ‘¬A → ¬B’이 타당합니다.

 

  • * 예를 들어, (비가 옴 → 젖은 거리)는 정원 호스[의 밸브]가 열려 있음으로 인해 거리가 젖을 수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비가 오지 않음 → 마른 거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 * 그러나, 거리가 젖는 유일한 원인이 비가 오는 것이라면, (비가 오지 않음 → 마른 거리)는 올바릅니다.

 

5. 세 가지 특성의 경우에, 이 세상의 본질은 닛짜(nicca)이거나 아닛짜(anicca)입니다. ‘그 사이(중간)에’ 있는 것은 없는데, 즉, 닛짜(nicca)이거나 아닛짜(anicca)입니다.

 

닛짜(nicca) 또는 아닛짜(anicca) 본질은 두카(dukha), 수카(sukha), 및 중립 느낌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이 분석을 위해 단지 둑카(dukha) 또는 ‘둑카 없음(no-dukha)’만 고려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 번째 특성은 ‘앗따(atta)’이거나 ‘아낫따(anatta)’입니다.

따라서 이 증명을 위해 우리는 원래 진술을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즉, ‘(아닛짜 → 둑카) 및 (둑카 → 아낫따)’을, ‘(닛짜/nicca → 둑카 없음) 및 (둑카 없음 → 낫따/natta)’로 다시 쓸 수 있으며, 두 진술은 동일합니다.

 

6. 그러므로, 닛짜(nicca) 및 아닛짜(anicca)를 영구함 및 무상함으로 번역한다면, 위의 전제에서 고(suffering)는 어떤 것이 영구적인지 무상한지에만 달려 있기 때문에, ‘(무상 → 고)’라는 진술은 또한 ‘(영구함 → 고통 없음)’을 의미합니다.

 

  • * 따라서, 위의 [전제에 의한] 특별한 경우에서, ‘(영구함 → 고통 없음)’입니다.

  • * 그러므로, 자연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위의 특별한 경우에는 ‘(영구함 → 고통 없음)’ 및 ‘(고통 없음 → 영구함)’입니다.

 

논리학의 수학적 언어에서는, 이것은 다음과 같이 쓰여집니다.

(고통 없음 IFF 영구함), 즉 (고통 없음과 영구함은 서로 필요충분조건)

 

이것은 #3에 있는 것보다 강한 진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3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관련된 영구함이 없이 고통이 없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 * 더욱이,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결국 영구한 것은 없기 때문에 결코 닙바-나(Nibbāna)(고통 없음)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7.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도 결국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으로 아닛짜(anicca)를 올바르게 해석하면, 위 진술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고통 없음)과 (모든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가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있음)은 필요충분조건이다.

 

  • * 우리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즉 재탄생의 순환(윤회) 속에 있는 한 '고통 없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분석할 수 있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결국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은 결국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고통/괴로움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 자체가 괴로움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 * 따라서 ‘아윗자-(avijjā)’는 자연의 이 근본적인 특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 *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본질’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단지 이해’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마음은 그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생활에서 접하는만큼 많은 경우를 분석하고 이것이 사실임을 스스로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필자에게 알려주세요.

 

8. 이제 우리는 위의 #6에서 도출한 아닛짜(anicca)와 둑카(dukkha) 사이와 마찬가지로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 사이에도 유사한 강한 관계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단논법의 원리를 사용합니다.

((A \to B) \land (B \to C)) \to (A \to C)

 

따라서 원래 관계인 ‘(아닛짜 → 둑카) 및 (둑카 → 아낫따)’는 ‘(아닛짜 → 아낫따)’가 됩니다.

 

  • * 이제 #4 및 #5와 동일한 추론을 사용하여 ‘아낫따(anatta) → 아닛짜(anicca)’를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은 강한 진술을 가집니다.

 

  • * 아낫따(anatta)와 아닛짜(anicca)는 서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것은 자연(이 세상)이 아닛짜(anicca) 본질이라면 아낫따(anatta)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 이제, 다시 우리가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를 각각 무상(impermanence)과 무아(no-self)로 잘못 번역하면, 위에서 우리가 도출한 것은 ‘무상한(impermant) 것은 무엇이든 자아(self)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비활성 물체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진술입니다.

 

반면에, 올바른 해석을 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될 수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난감하다(어찌할 수 없다)(즉, 괴로움/고통을 겪게 된다)’.

 

  • *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세상 것을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하는 노력을 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는 한에서만 유효합니다. 참된 본질을 깨달으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들러붙음을 그치고 결국 이 물질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은 우리의 오랜 고통/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물질적 토대에서 해방될(벗어날) 것입니다.

  • * 따라서 ‘이 재탄생의 사이클(윤회)의 난감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길)은 닛짜 산냐(nicca sanna)(세상 것들을 자신이 만족스럽게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를 제거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인 ‘아닛짜 산냐(anicca sanna)를 육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닙바-나(Nibbāna, 열반)로 가는 길이며, 단계를 거쳐 [닙바-나에] 도달합니다.

 

10. 따라서, 붓다께서 이 세상의 피할 수 없는 고통/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견하신 ‘루프홀(loophole, 빠져나갈 구멍)’은 그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을 이해하고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 * 다시 말해, 해결책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결국 행복을 주도록 설정되지 않은 세상 것들에 기꺼이 들러붙기 때문에만 고통/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 * 이 세상 것들에 기꺼이 들러붙는 이 행위를 ‘빠띳짜(Paṭicca)’(‘pati’는 ‘붙음/접착’을 의미하고 ‘ichcha’는 ‘좋아함’을 의미함)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사마 웁빠-다(sama uppäda)’(‘sama’는 ‘동일한/유사한’을 의미하고 ‘uppäda’는 이 세상에 또 다른 존재를 의미함)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원리인, ‘아윗자-(avijjā)’가 있는 한 이 재탄생의 순환에서 고통/괴로움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 빠띳짜 사뭅빠-다 ㅡ '빠띠+이치차' + '사마+웁빠-다' ”를 참조하십시오.

  • * 따라서 이제 우리는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이 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세상 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인 ‘닛짜 산냐(nicca sanna)’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이 세상의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이 사실이라면, 다른 두 가지는 논리적으로 뒤따르는데,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고통 없음’(즉, 행복하거나 마음의 중립 상태)을 주는 것으로 논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참으로 난감하고 어쩔 수 없고(아낫따, anatta), 논리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 * 핵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닛짜 산냐(nicca sanna)로, 즉 우리가 만족스럽게 세상 것들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며 결국 고통/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숙고하고 이해해야 할 미묘한 지점입니다.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은 우리가 닛짜 산냐(nicca sanna)라는 반대 관점을 취할 때에만 우리를 괴로움/고통으로 이끕니다.

  • * 분류/정리해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세상의)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과 (우리 마음 속의) 닛짜 산냐(nicca sanna)입니다.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인 이 세상에서 해방되는(벗어나는) 길은 그것을 이해하고(즉, ‘아닛짜 산냐’를 육성하여) 그에 따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들러붙지(Paticca) 않는 것입니다.

  • *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실현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소따-빤나(Sotāpanna) 단계에서조차도 사람은 이것을 기본적인 수준으로만 깨닫습니다.

  • * 이것이 붓다 담마의 기본(기초)이며, 그것은 여러가지 방식(방법)으로 설명되며,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가 핵심입니다.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닛짜 산냐(nicca sanna)’로 인해 일어나는 ‘아윗자- 빳짜야- (아비)상카-라(avijjā paccayā (abhi)saṅkhāra)’로 시작하여, ‘자라-, 마라나, 소까, 빠리데와, 둑카, 도마낫사…..(jarā, marana, soka, parideva, dukkha, domanassa…..)’로 끝납니다. 우리는 닛짜 산냐(nicca sanna)로 인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탐욕, 증오, 무지에서 생성된 행동, 말, 생각)를 행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미래 고통/괴로움을 생성합니다.

  • * 이것이 이 세상의 참된 아닛짜 본질(anicca nature)을 이해하고 아닛짜 산냐(anicca sanna)를 육성할 때까지는 탐하고 미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들은 닛짜 산냐(nicca sanna)를 가진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Nanum Barun Gothic"]}
{"google":["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